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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05, Oct 2023

파비안 피크
Fabian Peake

전복되는 부조리의 시화(詩畫)

● 김미혜 기자 ● 이미지 작가 제공

[The Thought] 2021-2022 Oil on canvas 134.5×155cm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Peter Ma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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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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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영국 서머셋에서 80번째 생일을 맞이한 작가 파비안 피크(Fabian Peake)의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됐다. 피크는 화가이자 동시에 시인으로 저명한 한스 아르프(Jean Hans Arp),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파울 클레(Paul Klee)에 근간을 두고 회화, 조각 등의 매체를 글쓰기와 시의 영역으로 통합하며 작업을 확장해왔다.

전시는 197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유희적이고 실험적으로 미디어를 다뤄온 그의 고유 미적 스타일과 접근 방식을 보여주는 한편 광범위하고 다각적인 경력을 기념했다. 시와 그림, 시화(詩畫)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보는 피크는 “내가 시를 쓰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방식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평행점이 존재한다(There is an unavoidable parallel between how I build a poem and the way I construct a painting)”고 이야기한다.



<Pierrot’s Message> 1971 Oil on canvas 
182×243cm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Peter Mallet



피크는 판타지 소설 『고멘가스트(Gormenghast)』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아버지 머빈 피크(Mervyn Peake)와 화가인 어머니 매브 길모어(Maeve Gilmore) 사이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1946년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삽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점에 비춰 작가가 어릴 적부터 초현실적인 구성과 표현방식에 익숙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60년대 후반 피크는 본격적으로 런던 예술계에서 화가로 부상한다.

1950-1960년대 첼시 예술대학교(Chelsea College of Arts)와 왕립예술대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공부하며 이성과 상상, 현실과 꿈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샤임 수틴(Chaïm Soutine), 호안 미로(Joan Miro), 페르낭 레제(Joseph Fernand Henri Leger) 등의 사조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경향은 그의 초기작 <피에로의 메시지(Pierrot’s Message)>(1971)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곡된 구도, 콜라주된 이미지, 추상적 형태 등의 표현적인 기법 외에도 단연 눈길을 끄는 건 그림 중앙에 있는 피에로의 형상이다.



<Out of the Egg> 1987 Oil on canvas 
167.5×175.5cm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Peter Mallet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는 무대 위 주인공처럼, 한 손에 천으로 뒤덮인 무언가를 움켜쥔 채 보란 듯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내 거대한 비밀이 폭로될 것임 예상되지만, 정작 그의 의중이 무엇인지 숨겨진 메시지에 대한 실마리를 화면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이렇듯 피크는 특유의 초현실적인 구성과 스토리를 캔버스 안에 녹여내며 유머러스함이나 묘한 섬뜩함, 기묘함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제로 활용한다.

이후 그의 작업은 점차 대담하고 다채롭게 변모한다. 자동차나 나무, 집, 빗, 가게 간판 또는 맨홀 뚜껑과 같이 일상의 소재를 활용해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앞서 살핀 <피에로의 메시지>를 비롯해 <오렌지색 말(The Orange Horse)>(1972-1973)과 같은 초기 작품에선 동물과 인간, 자연의 요소를 결합해 밝은 패턴이 있는 공간에서 규모를 뒤틀어내고, <리본의 춤(Dance of the Ribbons)>(1995-1996)이나 <그도 여기 있었다(He was here too)>(1983-1984)에선 익숙한 형상을 추상의 형태와 색상으로 축소시키는가 하면, <생각(The Thought)>(2021-2022)과 같은 근작에선 “처음에 그려진 이미지는 그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모를 것”이라는 스스로의 말처럼 즉흥적인 상호 작용을 바탕으로 생물학적 형태와 거울 문자(mirror writing), 목가적 이미지를 조합해 생동감을 부여한다.



<In the Hall> 1987 Oil on canvas 191×199cm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Peter Mallet



이처럼 익숙하지만 서로 무관한 요소를 작품이라는 틀 안에서 ‘논쟁’ 혹은 ‘충돌’시키고 전통적인 구조와 형식에 균열을 가해 끝내 붕괴시키는 피터의 작업 방식은 불안정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동시에 사물 간의 관계를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정립하도록 이끈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그는 시를 쓸 때 단어가 문장으로 조립되는 과정에 비하기도 한다.

시는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는 그 사전적 정의만큼이나 단어의 질서와 규칙이 형성하는 리듬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 피크는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해 낯설고도 독특한 흐름을 구성하는 방법을 택하는데, 가령 페이지를 가로지르는 형태로 텍스트를 배열한다거나, 단어를 삭제하거나 문장의 순서를 뒤바꾸고, 줄 바꿈과 구두점을 추가하는 식이다.



<A Pineapple’s Distain> 2017 
Oil on canvas 66×56cm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Peter Mallet



뿐만 아니라 문자를 조합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글을 거꾸로 쓰는 법을 독학하는가 하면, 단어의 성조와 그 의미에 미치는 영향을 시험하는 실험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러한 면모는 그의 시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기존의 가치체계를 부정하고 반예술적 활동을 새로운 창조 활동으로 추구한 네오다다이즘(neo-dadaism)을 계승했다는 점과 그 이론의 핵심이 바로 부조리(Irrationality)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일례로 1998년에 쓴 <수색(The Search)>을 보자.

작품 속 화자인 수색자(Searcher)는 ‘안개 뒤의 나무(in the trees behind the mist)’, ‘창문 주변의 밤(in the night around the windows)’과 같이 친숙한 단어를 낯설게 조합한 표현을 빌려 욕망의 대상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는 대상을 발견하고 소유하는 통념 대신 ‘당신이 숨기를 기대하고 원한다(I expect and want you to hide)’며 대상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기를 택한다.



<Fourteen Hamburgers> 1997 Oil on canvas
 129.5×155cm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Peter Mallet



관념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부러 대상과의 거리를 벌리고 끝없이 찾아 헤매기를 마음먹는 일. 멀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발견할 수 있으므로 그는 그것을 ‘기쁨’이라 부른다. 이렇듯 관습적 의미를 부수고 부조리를 충돌시키며 실존에 의문을 던지는 피크는 무언의 형상을 쫓는 덤불 속의 수색자다.

“시는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行), 이어진 연(聯).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 아래로 쌓여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Installation view of <Fabian Peake. an eye either side> 
2022-2023 Hauser & Wirth Somerset, Bruton, UK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Ken Adlard



어느덧 80살을 넘긴 작가는 여전히 시의 리듬을 타고 그림 속을 걸어가며 인생을 쌓아 간다.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안경을 쓴 듯, 그의 육성은 종종 우리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불안을 거두고 가만히 그의 그림과 글을 들여다보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때, 부조리와 불확실의 전복된 렌즈 사이로 예기치 못한 행과 연의 합이 비칠 테니 말이다.PA

 [각주]
* 신형철, 『인생의 역사』, 난다, 2022, p. 7



Installation view of <A Swift at the Corner>
 2019 Kunstmuseum Luzern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Marc Latzel



<Dance of the Ribbons> 1995-1996
 Oil on canvas 166×240cm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Photo: Peter Mallet



작가 파비안 피크(Fabian Peake)는 1942년 영국 서섹스주 러스팅턴에서 태어났다. 첼시 예술대학교(Chelsea College of Arts)와 왕립예술대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회화를 전공했고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Manchester Metropolitan University)에서 수석 강사로 그림을 가르쳤다. 전 세계 유수 기관에서 작업을 선보였으며, 2019년 12월부터 2020년 2월까지 루체른 국립미술관(Kunstmuseum Luzern)에서 개인전 <A Swift at the Corner>를, 2022년 10월부터 2023년 1월까지 하우저 앤 워스(Hauser and Wirth) 서머셋에서 회고전 <An Eye Either Side>를 개최했다. 현재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Portrait of Fabian Peake Courtesy the artist 
© Fabian Pe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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