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1. Exhibitions
  2. Review
현재 위치
  1. Exhibitions
  2. Review
현재 위치
  1. Exhibitions
  2. Review
현재 위치
  1. Exhibitions
  2. Review
Issue 167, Aug 2020

콰이어트

2020.7.23 - 2020.8.16 스페이스 윌링앤딜링

Share this

Save this

Written by

안소연 미술비평가

Tags

말과 몸의 미학적 잔해



언제였나, 몽골에 사는 누군가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는 내가 그의 언어를 읽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인지, 안부 전하는 글을 짧게 적어 놓고는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종이에 그림을 그려 편지와 함께 넣어 보냈다. 몽골의 흙색 초원이 그림의 바탕이 되었고 그 위로 두어 채의 집이 먼 거리감을 드러내며 나란히 붙어 있었으며 먼 하늘의 철새 떼와 땅에 움트기 시작한 풀과 땅에 나란한 하늘색 투명한 호수가 대기의 온도를 가르면서 본 적 없는 몽골의 풍경을 내 체온에 전해주었다. 한때 그곳에 있었던 이 종이(의 현전)에 깃들인 것인지, 이 종이에 펼쳐놓은 풍경 그림에 깃들인 것인지, 가본 적 없는 그곳의 온도를 내가 본 것이다.


그 그림의 맨 위 가장자리에는 몽골어로 된 한 음절의 단어를 적어 놓았는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그 말의 생김새를 들여다보며 그것의 소리를 상상했다. 볼 수 없는 것, 그러니까 볼 수 없어서 알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과 실패 앞에서 그것을 넘어선 비현실적인 대상을 발견하는 깨달음의 사건 같은 것이다. 몽골에서 나에게 온 그림은, 단지 상상을 통해 침묵과 미지의 형상들이 감각 속에서 살아남으로써 현실을 깨뜨릴 수 있는 예술적 권한에 대한 메시지를 내게 남겼다. 이 기억을 내가 다시 떠올린 까닭은, 장성은과 로와정의 2인전(혹은 3인전) <콰이어트>를 마주했을 때, 상상이 매개하는 신체적인 감각이 공간에 꽉 찬 침묵의 밀도만큼이나 허구와 사실의 문턱을 동시에 밟고 있는 미학적 사건에 대한 경험을 소유하게 한다는, 말하기 힘든 어떤 믿음의 차원 때문이었다. 

둘은 (혹은 셋은), 어떤 절차를 통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간을 비현실적으로 둘로 나누어서 어떤 경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지속해서 번복하며 규명하는 그 문턱에서의 행위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공간을 둘로 나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장성은과 로와정은 전시 공간을 허공에서 수평으로 둘로 나눠 공간에 들어선 현실의 진부한 몸(들)을 긴장시킨다. 위, 아래 사이에 흐릿한 경계를 지어 놓고 텅 빈 시선의 함정들을 열어놓은 것 마냥, 이 공간의 문턱에 사로잡혀 “정지된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의 움직임”이 비어 있는 사물/세계를 향해 두리번거리는 내내, 사물/세계는 또 그 침묵하는 움직임의 텅 빈 시선을 동일하게 바라본다.


이를테면, 두 개의 공중그네가 공간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서로 마주보며 허공에 매달려 있다. 단단한 흰색 밧줄이 지탱하고 있는 막대 안쪽에는 서로 주고 받는 대화/대사처럼 영어와 러시아어로 각각 “words never can be learnd”와 “техника, которая повторяет неудачи”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로와정의 <trapeze>(2020)는 “영원히 습득할 수 없는 언어”와 “실패를 거듭하는 기술”로 번역되는 각각의 문구를 정지되어 있는 공중그네에 중첩시켜, 이 정지된 순간에 대한 어떤 상상과, 어떤 움직임(행위)을 연쇄 시킨다. 이에 대해, 나는 무언가를 조금 더 말해야 할 텐데, 그 일은 잠시 뒤로 미루고, 공중그네가 상상해내는 (정지된) 진자의 움직임 밑에, 삼각형 꼭지점 중 하나에 낮게 앉아 나머지 점들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장성은의 <발>(2020), <어깨>(2020), <목>(2020)은 몸의 잔해라고 부를 수 있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궁극적으로는 일련의 예외적인 형상을 위한 (근원적인) 물질에 대해 꿰뚫어 볼 시선/시점에 대해 환기시켜준다. <발>을 바라보는 자리는, 마치 누군가가 왼쪽 발을 소반 위에 올려 놓기위해, (아니 왼쪽 발바닥을 소반의 상판에 맞닿아 지탱시켜 놓기위해,) 어중간하게 무릎을 구부리고 서서 둥근 무릎 언저리에 흰 공을 묶어 두고 둘째 셋째 발가락 사이에 무릎 높이 만한 흰 꽃의 줄기를 꽂아, 발끝에 모아진 힘으로 이루어낸 이 정지된 형상을 다시 흩지 않고 내내 거기에 둘 수 있는, 이 궁극의 상황 내부에 위치한다. 이를테면, 이 바라보는 자리는, 두 다리를 구부려 노란 의자인지 선반인지 하는 데에 앉아 무릎 깊숙이 발꿈치를 얌전히 갖다놓도록 하고는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려 그 몸에 만들어진 일련의 새로운 힘과 긴장에 힘입어 내내 바라보는 것과 정지의 순간을 이루게 하는, 형상의 받침대 노릇을 한다. 이때, 일련의 연쇄하는 형상들은 마치 조각인 양, 그것을 이루는 몸의 모든 잔해들을 순수한 물질의 차원으로 옮겨 놓는다.



 장성은 <목> 2020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사진 설치 65×86.7cm





순수하다는 말을 쉽게 믿지 않지만, 몇 가지 정황에 이끌려 추측해 볼 때, 로와정은 <trapeze>에서 어떤 순수한 형태들에 대한 염원 혹은 믿음,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둘이 함께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데,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사각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긴 대각선 위에 공중그네 두 개를 마주보게끔 서로 평행하게 매달아 놓고, 허공에서 그 둘이 관계 맺는 빈틈없는 위치가 서서 이리저리 배회하며 움직이는 어떤 몸(들)의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표준적인 시선을 충분히 고려하였을 거라는 상상을 통해, <trapeze>가 이 실제의 공간을 재/구축하는 감각의 함의에 있어서 (습득할 수 없는) 언어를 넘어서는 (실패를 거듭하는) 기술에 대한 어떤 경이로움을, 이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까 말이다. 예술에 관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words cannot be learned”와 “техника, которая повторяет неудачи”라는 문구가, 공중그네라는 오브제-나는 이 공중그네를 오브제라 부르는 것이 가장 중립적이라고 판단했다-에 잠재된 움직임의 형태 및 기술의 상상적 장면들에 개입해 어떤 정황을 구체화시킬 때, 로와정은 그 베일 너머에서 (먼 과거의 미학적 논의로 대체된) 순수한 형태로서의 예술에 대하여 새로운 합의를 찾고 있었나 보다. 이를테면, 습득할 수 없는 언어로서의 예술에 대한 비언어적 지각과 실패를 거듭하는 기술로서 불가능과 실패가 연단시키는 미학적 상상에 대한 믿음 같은 것. 마치 “техника, которая повторяет неудачи”의 언어가 갖는 의미를 돌파하여 그것의 배열이 만들어낸 형태의 감각을 바라볼 줄 알고 그것의 소리를 상상해내는 미학적 태도와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 같은 것 말이다.


사진을 느슨한 긴 원통형으로 말아서 네 개의 가느다란 막대가 받치고 있는 사각의 나무판 위에 올려놓은 장성은의 <목>을 보면, 몸과 사진과 조각의 잔해들이 한데 섬세하게 구축하는 미학적 순간에 대한 새삼스러운 경험을 말할 수 있게 될 테다. 추상적인 감각과 신체의 감각이 같은 상상의 경로에서 미학적 일치를 이루는 이 한시적인 경험에 대해, 언어의 빈약함을 탓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을 테다. 말이 형상이 되고, 형상이 말이 되는, 그 아이러니의 미학적 순간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닥과 두 개의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놓인 <어깨>는 형상의 잔해로서 몸과 사진과 말에 대한 상상을 이끈다. 장성은은 한때 몸(어깨)과 결합해 정지된 순간을 이루기 위해 직접 만들어 사용했던 얇은 선재의 오브제를, 양감이 느껴지는 작은 덩어리 위에 삼각형의 받침대를 올리고 그 위에 균형 있게 얹어, 보이지 않는 몸과 그 어깨를 상상한다. 


이 <목>과 <어깨>에 대한 응시는 보이지 않는 것, 즉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적 응시를 실현시킨다. 감춰진 말과 몸의 잔해들이, 동시에 나를 봄으로써. 어떤 철학자가 말했듯이. 공간을 둘로 나눠 허공에 가로질러 놓인 공중그네와 그 아래 세 개의 꼭지점으로 펼쳐 놓은 <발>, <어깨>, <목>은, 침묵에 가까운 고요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움직임과 소리와 형상에 대한 상상을, 또한 응시한다. 이 고요(quiet)는 단지 소리 없음의 침묵이 아니라, 서로의 상상적인 시선과 움직임이 교차하면서 작은 파열이 일어나고 틈이 벌어지는 일련의 공백과도 같은 미학적 사유의 정서일 거라 고쳐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전시 전경

온라인 구독 신청 후 전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Subscribe 로그인 Log in



메모 입력
뉴스레터 신청 시, 퍼블릭아트의 소식을 빠르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뉴스레터 구독에 자동 동의됩니다.
Your E-mail Send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