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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65, Jun 2020

새로운 상점
(AU MAGASIN DE NOUVEAUTES)

2020.5.8 - 2020.7.5 아뜰리에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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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허호정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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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고 녹이고, 가설된 리얼리티


전소정은 무빙이미지를 다루고, 조각을 만지며, 책을 엮고, 비평을 요청하며, 음악을 만들고, 공간을 조성한다. 개인전 <새로운 상점>에서도 우리는 전소정이 다양한 매체를 경유하여 전시장을 채우는 모습을 확인한다. 이는 물론 다층적인 감각의 병렬적 공존 혹은 하나의 텍스트로부터 출발한 이형의 번안들로 볼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리 단순치 않다. 여기서 감각은 이쪽에서 저쪽으로의 전이의 문제가 아니며, 보는 사람 개개인에게 귀속되는 주관적 경험일지라도 서로 중첩되고 투시되는 감각들을 건축적으로 조성한 것이라 여기는 편이 더 타당하다. 이미 그 자체로 현실과 유리된 소격으로서 무빙이미지와, 조각과 책으로 나타난 물리적 실체들은 보는 이의 마음들(감각들, 사유들) 안팎에 가상적 현실을 축조한다.

1. 전소정의 무빙이미지

당대 한국 미술 지형에서 무빙이미지는 이미 현실과 유리된, 소격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동시대 매체 조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이미지의 편집과 재생산의 무한한 방사 안에서 작동하는 한편, 꽤 강박적으로 극영화적 서사와 단절하기를 추구하고 또 유희한다. 이 지대 위에서 전소정의 무빙이미지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볼 법하다. 그의 영상은, 다루는 ‘대상’ 혹은 ‘주제’가 무엇이든 간에 현실에서 길어 올려진 그것을 영상의 내재적 세계 안으로 옮겨 버린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무엇을 ‘대상 삼는’ 차원이 아니라, 영상 스스로 현실을 새로 구축한다. 
그는 영상이 으레 그 시-청각의 불일치로 인해 현실의 현상학적 존재와 구분될 수밖에 없는 정황과는 무관하게, 현실과 외따로 존재하는 리얼리티를 만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때 리얼리티는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 조직되는 픽션으로(예술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촬영한 ‘예술하는 습관’ 시리즈), 사실의 추적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는 가상적 이미지로(해외로 입양된 사람들의 서로 다른 언어와 회상을 구성한 <Interval, Recess, Pause>), 지도에 귀속하는 정박이 아니라 벗어나고 표류하는 항해의 심상으로(망명, 난민, 여행의 여정을 소설의 참조점으로부터 그려낸 <광인들의 배>) 나타났다. 전소정에게 현실은 여전한 참조점이지만, 그의 무빙이미지는 우리의 현실에 구멍을 내거나 재조정하는 별개의 리얼리티를 가설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절망하고 탄생하라>가 나-너-우리의 주어를 거치면서 ‘결석’을 언급하는 지점도 마찬가지다. “꿈”이라 불리게 된 영상은 꿈을 꾸는 주체를 결여한 3인칭의 상황을 마련하고, 우리가 딛고 있는 그 현실이 아닌 다른 리얼리티로 스스로를 상정한다. 파리와 서울, 도쿄의 도심을 담은 영상에서 ‘현실’은 분명히 노출되지만, 이제 <절망하고 탄생하라>에서 밤과 낮을 가로지르는 도시의 풍경은 우리가 아는 그 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너-우리가 결석한 몽타주는 현실 세계를 익숙하지 않은 관점에서 다시 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다리와 비계를 딛고, 지붕과 난간을 움켜쥐고 운동하는 각기 다른 시점의 주체들이 현실 세상을 만진다. 여기서 주체는 작가 자신이기도, 카메라를 몸에 부착한 퍼포머이기도, 이 모두를 감관하는 관람객이기도 하다. 이들이 세상을 만질 때 그 감각은 표면과 표면이 맞대어진다는 차원이 아니라, 환경에 대한 조감과 낙차를 의도적으로 자각함으로써 인식적으로 발생한다. 다시 말해, 여기서 촉각은 현실의 부딪침이 아니라 인식적 차원의 가상적 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절망하고 탄생하라>는 현실의 재조정, 가상적 리얼리티를 촉각적으로 구축하려 한다. 이는 다음에서 살필 감각, 현재에도 유효한 모던적 감각인 낙차에 대한 이중적 심리 기제를 건드리면서 만들어진다.


2. 새로운 상점: 모던, 건축, 이상

우리 모두에게 모던의 히스테리는 여전한데, 그것은 새로움/진보에 대한 반쪽짜리 믿음을 지속시키는 일을 말한다. 그러니까 새로움과 진보를 쫓는 한편, 진정한 새로움도 진보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안 상태의 회의를 공존 시키는 반반의 마음. 이것은 서구적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기술과 과학, 자본의 축적을 따라 생겨나는 이질적 감각을 끊임없이 갱신한다는 의미에서 우리 쪽, 식민지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무한히 재생산되는 물질과 그 감각은 이전의 부산물과 병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노출되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동시에 퇴색하고 마는 이중적 마음을 낳는다. 이는 앞서 말했듯 포스트모던을 지난 당대의 ‘현대인’에게도 여전한 증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모던-인이다. 
모더니티에 대한 특수한 감각적 반응은 ‘모더니즘’으로, ‘아방가르드’로 나타났다. 전시가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시인 이상(의 삶)과 그의 시는 그 사례가 될 것이다. 

전시를 관통하게 된 거대한 수로로서 이상의 시는 전소정의 이번 작업의 출발 지점이었지만 곧 도착 지점이 되며, 다시 출구가 되기도 한다. 이상을 통해, 이상에 닿고, 다시 멀어지면서 전시가 살피려는 감각은 바로 이 조감, 높이를 갖고 현실을 압축적으로 투시하는 감각이다. 위로 세우고 아래로 떨어지는 일에 대한 야릇한 상상과, 이에 동반하는 단절의 인식은 앞서 말한 모던-인의 히스테리, 새로움과 진보에 대한 믿음과 회의의 이중주를 대변한다. 무한히 확장되는 네모들, 중요한 것에서 덜 중요한 것으로 떨어지는 연속체의 도식, 의미론적이고도 통사적으로 인접한 (불)가능성을 시도하는 일 모두 이러한 낙차의 감각을 다루는 것으로 보인다. <절망하고 탄생하라>가 자주 비추는, 올라가고 관통하는 한편 내려다보는 장면 역시 이와 맞닿는다. 이러한 정황은 도심을 내려다보는 백화점 옥상에서 겨드랑이 밑 날개 돋침을 기대하고 좌절하는 일(이상, 『날개』)만큼이나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공감 안에서 영상 속 주체, 영상을 만든 주체, 보는 주체 모두가 개별적 수준에서 이해한 ‘만져진 세계’를 공유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상점>은 또 한 번 어떤 리얼리티-세계를 형성한다.


3. Organ

<절망하고 탄생하라>에서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끌었을 ‘광고’는 전시 전체를 이해할 하나의 지점을 마련할 지도 모른다. 광고는 바위 모형을 판매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거대하고 운반하기에 무거운 ‘진짜’ 바위 대신 조형적이고 실용적인 이것을 구매하라는 것이 요지다. 원래 바위는 건축의 평평한 지반을 마련하기위해서 없애야 할 대상이다. 세우고 조감하고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수직적 세계 안에서, 버티고 앉아 꼼짝 않는 바위는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절망하고 탄생하라>의 광고가 보여주는 바위의 성질은 그 반대다. 오히려 옮기기 쉬우며 위아래로 뒤집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바위를 구매하라는 논리는 앞서 모던의 감각이라 말했던 건축술이나, 낙차에 기대어 발생하는 이중적 감정의 히스테리를 뒤집는다. 이 바위는 건축을 배반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으면서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바위는 광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가소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등장한다. 전시장 곳곳에 설치된 조각이 그것이다. 자연물이기보다는 도시의 부산물로 구성된 이 바위는 녹인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투명으로 빛나는 인위적인 상태를 가시화한다. 이제 영상과 전시장 전체를 휘감는 것은 투시, 조감의 감각의 다른 편에서 굴착과 용해의 감각이 드러난다. 그것은 낙차로 유발되는 것이 아니고, 강도로 유발되는 촉각적 심상이다. 단단한 것을 뚫고, 유약한 것을 통과하여 만들어지는 플라스틱 바위.

<새로운 상점>이 선보이는 바위의 역설적 상태는, 우리가 ‘바위’라 읽은 이 조각들의 이름을 통과하여 또 다른 지점에 놓인다. 도시의 골목을 헤집고 녹여 만든 이 조각들, 그 바위의 이름은 ‘기관(organ)’이다. 얼굴, 무릎, 눈, 심장, 골반이라는 신체의 기관으로 이름을 획득한 이 조각들은 그것이 ‘기관’인 이유로 도구와 다르다. 도구는 어떤 쓰임을 늘 염두에 두며, 신체의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정의되는 미디어와 같이 세계 속으로 무한히 확장된다. 그러나 기관은 오로지 내부적인 상황에 머문다. 그것은 현실 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마음과 더 밀접하며, 확장되기보다는 수축한다. 또 기관이 기관으로서 의식될 때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때라기보다는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다하지 못할 때이다. 

그것은 세계 밖으로 가시적인 작동을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내부에서, 그것도 ‘잘’ 작동될 때에는 모습을 감춘다. 그런 의미에서 기관은 도구적 ‘쓸모’라기보다는 ‘상태’에 가깝다. 다시 ‘기관’으로 이름 붙여진 조각과, 주석과 도해이며 오브제이기도 한 ‘organpress’의 책(『ㅁ』)을 보자. 그것은 무빙이미지 속 화자가 “평면”, “입방체”, “삼각형”으로 세계를 상상하거나, 세계를 만지며 그 나름의 인식적 감각을 구축하는 동안, 우리의 ‘이’ 현실 쪽에 다른 공간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공간은 쓸모가 아닌 ‘상태’로 존재하며, 스스로의 내부를 향하며, 세운 것을 다시 녹이는 작업이자 해부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점유한다. 기관으로서 조각과 책은 전소정의 어떤 리얼리티를 한편에서 구성하며, 우리의 ‘이’ 현실로부터 계속해서 거리를 벌려 놓는다.  


*전소정 <새로운 상점> 2020 아뜰리에 에르메스 사진: 김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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