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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85, Oct 2013

정정주
Jeong Jeong Ju

나르시시즘, 응시의 교차로

대개, 전시를 볼 때, 우리는 응당 그곳에 작품이 놓였으리라 여긴다. 당연한 듯 여겨지는 이치를 설명하는 것은, 관람을 위한 ‘작품/대상’을 상정하고 그 대상이 점유하는 공간을 찾는 행위가 전시 관람의 중요한 과정임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이때, 작품은 인식론적 가치를 담고 있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 안쪽에 비밀을 완벽히 감추고 있는 단절된 세계로서 이해된다.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어떤 분리를 가정한다. 작품은 텍스트가 되며, 관람자는 독해자로서 분한다. 현대의 미술 전시에서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런 작품 수용 과정은 사실, 불과 반세기 전엔 미술의 성립 조건이었다.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은 그들의 역사와 매체의 대상적 조건의 발견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표현을 계발했다. 대상의 독립과 매체성에 대한 인식이 곧 주체의 위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보자. 작품을 만나야 할 전시장에서 ‘나’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시 말해, 주체가 쏘아 올린 (대상을 향해야 할) 시선이 다시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것은?
● 안대웅 기자 ● 사진 서지연

'빌딩 2006(Building 2006)' 2006 나무, 아크릴, 형공등, 6대의 소형 비디오카메라, 4개의 모터, 비디오 프로젝터 300×600×19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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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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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주의 ‘샤우하우스(Schauhaus, 보는 집)’ 시리즈 중, 기념비적 초기 작업 <모델(Model)>(1999)에서 그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런 주체와 대상 간의 위치 설정의 애매성에 관한 문제였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건축 모형이, 테이블 아래에는 작은 모니터가 놓여 있다. 모니터는 건축 모형 내부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가 레코딩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피드백하고 있다. 만약 어떤 관람객이 모형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모니터는 클로즈업되는 관람객의 형상을 즉시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델>은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투사하는 비디오의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는 ‘모델’이다. 이때, 대상/존재에 대해 인식론적 혼란이 온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은 바로 나다. 나는 여기 있는데 저기도 있다. 비디오의 피드백 루프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자의 세계에서는 참조할 만한 대상성 자체가 없다. (오직 자신뿐이다.) 신체는 카메라로 시작해서 모니터로 닫히는 완벽한 자기-참조적 세계의 중간 항으로서 반복적으로 (마치 거울상처럼) 반영되며, 그 속에 영원히 봉인된다. 이렇게 비유하는 편이 쉬울듯한데, 신체는 마치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처럼, 자동 반영 기계가 만들어내는 스스로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얼어붙는다. 나아가 이런 구조적 특질은 비디오 미디엄의 심리적 조건을 드러낸다. 그것은 「Video: The Aesthetics of Narcissism」 (1976)에서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지적한 바 있는, 비디오 미디엄 고유의 나르시시즘이다.



<Houses> 2012 3D애니메이션



폐쇄회로 안에서 내가 그것을 볼 때, 그것인 나는, 나를 동시에 본다. 크라우스가 같은 글에서 예로 든 리차드 세라의 작품   <부메랑(Boomerang)>(1974)은 이 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이 비디오 속에서 낸시 홀트는 자신의 목소리를, 미세한 시간차(1초 미만)의 오디오 피드백으로 들으며, 그 상황을 다시 말로 표현해 내고 있다. 그녀는 오디오 피드백이 생각의 프로세스를 방해하고, 말하는 것과 듣는 것 사이의 비동기화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다고 묘사한다. “나는 말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말해진) 처음 부분이 돌아오는 걸 듣고 두 번째 파트를 까먹거나, 첫 번째 말에 의해 내 머리가 새롭게 자극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녀는 말한다. “거울-반사(mirror-reflection)같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둘러 싸여있고, 내 마음은 나를 둘러싼다… 탈출구는 없다.” 참조할 텍스트로서의 과거가 현전하는 감각─그러니까 “붕괴된 현재의 감각”─속에서 퍼포머는 시간적 거리감의 혼동을 겪는다. 그리고 곧 자신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고립감을 느낀다고 실토한다. 크라우스가 ‘자기-캡슐화(self-encapsulation)’─스스로에게 둘러싸인 신체와 정신─라고 부른 이 상황은 “자기-반영(self-reflection)의 조건을 증진하는 폐쇄된 공간을 구축”하며 그 속에서, 퍼포머(혹은 관객)는 자신의 이미지를 참조 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반복적으로 영속화시킨다. 이것은 결국 대상이 주체를 전유함으로써 주체와 대상의 분리를 환영적으로 지우는 일이며,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나르시시즘의 특정한 조건─“리비도를 대상에게 투자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상-리비도(object-libido)를 자아-리비도(ego-libido)로 바꾸는 것”─에 해당한다.



<모델(Model)> 1999 모델집, 소형감시카메라,
 TV, 책상 130×100×50cm * 모델집 안에 장치된 
소형 감시카메라를 통해 모델집 내부의 모습이 
TV화면에 나타남  



작가의 나르시시즘에 관한 탐구는 브레인팩토리에서의 개인전 <이너브레인(Inner Brain, 뇌 내)>(2003)에서 계속 이어진다. 구조는 사뭇 간단하다 못해 단순하다. 전 방위로 회전하는 카메라가 전시장 안을 샅샅이 훑고, 레코딩된 그 상황이 벽면 한쪽에 실시간으로 프로젝션 된다. 전시장 환경 자체가 ‘뇌 내’로서 자기-캡슐화된다. 그리고 관람객은 자기-참조적 질서 내에 철저히 봉합된다. <모델>보다 더욱 강력해진 나르시시즘이다. 하지만 정정주의 작업에는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심리적 조건─나르시시즘─으로 일반화 할 수 없는 요소 역시 존재함을 잠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모델>을 다시 보자. 앞서 언급했듯이, 수용기(건축 모형 혹은 카메라)와 투사기(모니터)가 구분된 형태의 설치다.(작가는 이 상태가 매우 완벽해서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다고 표현했다.) 이 물리적 조건 때문에 우리는 모니터를 보는 동시에 폐쇄회로 외부에서 건축 모형/대상도 함께 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은 비디오의 심리적 조건에 반하는 비평적 거리를 함께 탄생 시킨다. 나르시시즘 구조 밖에서 반성적 태도를 취하는, 주체의 위치를 가정함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르시시즘 미학은 여전히 정정주의 작업 분석에 있어 강력한 도구며, 나는 지금부터 이 모델을 조금 더 확장시켜볼 요량이다. 작가 스스로가 밝힌 바, 그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그것은 앞서 이미 살펴본 바 있는 ‘샤우하우스’ 시리즈(2003)와 ‘이너브레인’ 시리즈(2003) 그리고 ‘응시의 도시’ 시리즈(2007, 2008, 2010)다. 응시의 도시 시리즈는 어쩌면 샤우하우스 시리즈의 집이 도시적 규모로 확장된 꼴이다. 건물 안에 장치된 카메라가 그 상황을 전시장 벽면에 즉각적으로 투사하는 방식으로 기본적인 골격은 샤우하우스 시리즈와 같다. 다른 점은, 복수의 카메라가 복수의 건축 모형에 설치됐다는 점과, 모형 도시의 중심에 설치된 국소조명이 회전함에 따라, 뻗어져 나온 빛줄기가 전체 건물을 훑고 지나간다는 점이다. 인적 없는 건물 사이로 판옵티콘의 감시망만이 공허하게 맴돌며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마비된 도시”를 은유한다.



<형이상학적 별(Metaphysical Star)> 
2010 알루미늄, 아크릴, LED조명, 130x120.80cm



여기서 잠시 미디어가 주조하는 자아의 세계를 상상해 보자. 많은 분석이 뒤따라야겠지만, 미디어는 거울상으로서 실제적 삶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이해된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을 통해 실제로 현대적 미디어가 미디어 속의 삶을 실제의 삶과 동일시하게끔 유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미디어가 현실계에서 거대한 규모의 나르시시즘적 조건을 만들고 있다는 가정을 이끌어 낸다. 도시 자체의 나르시시즘이다. 도시는 도시화된 자아의 분신으로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참조하며 갱신해 낸다. 이것은 어떠한 의미에서 “마비”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나는 카메라, 신체 그리고 모니터가 작동시키는 피드백 루프를 정정주 작업의 요체로 가정하고 그 구성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조건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나르시시즘이다.) 다만, 다음의 질문이 남는다. 작가의 자기 참조의 여정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그리고 변화하는 미디어 여건 속에서 비디오 피드백은 어떤 방식으로 동시대적 의미로 재맥락화 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내일로 미루자. 끝으로, 이 글에서 빛에 대한 작가의 호기심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해야겠다. 빛은 신성의 알레고리이며, 나르시시즘은 완벽한 무한성의 체계다. 여기엔 분명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 역시 미래의 에세이로 미뤄두려 한다.



<응시의 도시(City of Gaze)> 2010 
나무, 아크릴, 스테인레스, 8개의 소형비디오 카메라, 
모터, 비디오프로젝터 김종영 미술관 



정정주



작가 정정주는 1970년 광주 출생으로 홍익대 조소과와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아카데미 마이스터 슐러(후버트 키콜 교수로부터 사사)를 졸업한 후 현재 국민대 박사과정에 있다. 김종영미술관(2010), 대안공간풀(2007), 신세계갤러리(2005)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였으며, <경계>(2009, 광주시립미술관), <City Net Asia 2007>(2007, 서울시립미술관), <Against Translation>(2005, 토탈미술관) 등 다수의 단체전 참여했다. 현재 성신여대 조소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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