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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5, Jun 2015

필름 몽타주

2015.5.7 – 2015.7.11 코리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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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섭 문화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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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와 반복, 그리고 새로운 서사의 탄생



몽타주가 낳은 새로운 서사


따로 촬영된 화면을 떼어 붙이면서 새로운 장면이나 내용을 만드는 기법, ‘몽타주(Montage)’의 정의다. 이는 영화를 만들 때 극적효과나 리듬을 주기 위한 방법인데, 따지고 보면 한 번의 롱테이크로 영화 한편이 다 돌아가지 않는 이상 모든 영화는 몽타주다. 하지만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 <파업(Strike)>(1925) 이래 몽타주는 어떤 의미를 좀 더 강하게 함축한다. 그건 편집, 즉 선택과 붙임의 과정에서 작동하는 작가의 의도다. 많은 필름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이어붙일 때 작가는 무언가를 의도한다. 몽타주야말로 작가의 의도성이 가장 깊이 개입하는 작업형식이다. 따라서 필름 몽타주는 작가가 계획된 의도에 따라 선택한 필름을 재구성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완성하고, 이를 관람자에게 전하는 예술작업이다.


<필름 몽타주>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몽타주와 아카이빙을 작업의 주된 방법으로 사용한다. 전시 기획자가 소개문에 밝히듯이 이미지를 모아 특히 영상을 재활용하고 결합하는 몽타주는 매끄러운 에디팅 대신 이미지를 불연속적으로 조합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충돌시키는 논리의 비약을 선택하는데, 이러한 몽타주 행위는 캐서린 러셀(Catherine Russell)이 언급하는 파괴의 미학을 공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들이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는무작위적인 파편화와 재배열을 통한 분열증적인 상황을 연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새로운 리얼리티,’ ‘새로운 서사,’ 즉 자신의 말을 완성하여 제시하기 위함이다. 이 일은 관객 혹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작가들의 소망일 것이다. ‘디지털과 웹에 의해 이미지의 축적과 조합이 자유자재로 이루어지는 이 시대, 현대미술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아카이브와 몽타주의 특성을 미디어 영상이라는 창구를 통해 바라보고자 한 이번 <필름 몽타주>전 또한 관객과 소통하는 예술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여겨진다. 


 

관객의 주관적인 해석을 기다리는 작품들


<필름 몽타주>전의 작품을, 중첩되는 부분이 있지만 편의상 비중의 정도에 따라 분류하자면, 기술적으로는 작가 스스로 촬영한 필름을 편집한 작품과 타인의 영상을 선택적으로 편집한 작품으로, 내용적으로는 사회정치적 문제에 비평을 가하는 작품과 시적이고 초현실주의적 감성을 이끌어내는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기획자는 필름 몽타주라는 영화적 개념을 미술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필름과 비디오, 몽타주와 콜라주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을 포함시켰다. 푸티지(footage) 영상과 걸어 다니는 이미지를 수집하여 재배열한 쇼반 데이비스+데이비드 힌튼(Siobhan Davies+David Hinton)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All This Can Happen)>, 중세교회의 콰이어를 60년대 팝 뮤직 여성 그룹의 코러스와 연결한 엘리자베스 프라이스(Elizabeth Price) <1979년 울워스 콰이어(The Woolworths Choir of 1979)>, 사운드와 문학 등의 매체를 결합한 베아트리체 깁슨(Beatrice Gibson)  <타이거스 마인드(The Tiger's Mind)>, 아카이브 자료를 비연속적으로 결합한 스테판 서클리프(Stephen Sutcliffe)의 영상 콜라주 <아웃워크(Outwork)>, 풍경을 360도 촬영하여 조합한 울루 브라운(Ulu Braun)의 비디오 콜라주 <파크(Park)> 등은 개념적이고 관념적 작업으로 초현실주의적 감성을 끌어낸다.


80년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영상자료와 동시대 부산에서 일어난 한 인간의 상황을 다채널 비디오로 보여주며 역사와 개체의 관계를 조명한 김아영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웹 이미지를 발췌 조합한 노재운의 <크리스 마처와 코레안들>, 할리우드 영화와 상업광고를 결합한 박민하의 <전략적 오퍼레이션-하이퍼 리얼리스틱>는 비디오 아트의 맥락에서 자기촬영 기법을 기존의 자료와 접목하여 작가 고유의 사회정치적 내러티브를 구성한다이 가운데 35분에 이르는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의 작품,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Workers Leaving the Factory)> 원본의 권위를 상실시키는 대신, 이질적인 관계 맺기 과정에서 친숙한 이미지들은 낯설게 하고 상투화된 질서를 위반함으로써 거대 서사가 놓쳐버린 또 다른 이야기, 즉 대안적인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필름 몽타주의 성격에 부합해 보인다. 


작가의 주관적인 선택이 작용한 몽타주의 본래 목적대로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의 모든 샷에는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의도는 몇 개의 영상을 조합한 후 이를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간간히 등장하는 바리케이드를 통해 때로는 은유적으로 때로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비추어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는 일은 관객의 일차적인 수확일 수 있다. 그렇다고 작가의 의도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작품을 해석하여 내면화하고 적용하는 일은 어차피 관객의 주관에 따른다. 여기에서 작가의 의도는 저자의 죽음으로 독자의 해석을 낳는 문학의 경우처럼(바르트, Roland Barthes) 그 의도를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관객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 하룬 파로키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

1995 35' 싱글채널비디오 ⓒ Courtesy of Harun Farocki

: 안체에만+하룬 파로키<노동을 비추는 싱글쇼트> 2013

 8채널 ⓒ Courtesy of Antje Ehmann and Harun Farocki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에 펼쳐진 존재론적 사유의 바다


 인간의 역사를 담은 시간을 싣고 오래된 흑백 필름이 돌아간다. 공간은 노동자들이 막 일을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공장의 문이다. 파로키는 영화의 기원, 즉 뤼미에르 형제(Les freres Lumiere)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1895)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영상으로 표현한 최초의 이미지가 노동을 벗어나 공장 문을 나오는 인간 군상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공장 문을 마치 단거리 주자처럼 서둘러 빠져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다(Homo Faber)’라는 선언적 명제대신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존재라고 말하는 듯하다.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이유는 노동의 즐거움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노동의 즐거움을 앗아간 원인을 밝히기 위해 파로키는 과거의 영화들에서 공장 문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갈등 장면을 재현한다. 노동은 삶의 질을 담보하는 기초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삶에는 위계가 존재한다. 인간은 자기위치에 따라 삶의 질을 정의하고 확보하려고 한다. 


자본의 정당한 분배를 폭력과 회유, 감시 등으로 차단하려는 지배 권력과, 정의와 파업으로 그를 성취하려는 피지배자는 노동의 현장인 공장 문 앞에서 끊임없이 대립한다. 그러나 피지배자는 결코 지배자의 바리케이드를 넘지 못한다. 이는 황량한 광야를 배경으로 크고 무척이나 강해 보이는 트럭이 불쑥 솟아올랐다 파괴 후 다시 숨어버리는 교묘한 바리케이드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는 장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시위의 역사에서 바리케이드가 강자의 접근을 막기 위한 약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 또한 이미지의 비틂으로 볼 수 있다. 지배자의 탐욕과 억압에 의해 지나친 노동에 시달리고 정당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노동현장은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나오고 싶은 공간이다. 


공장의 문은 노동과 일상의 경계다. 즐거움을 빼앗긴 노동의 현장에서 벗어난 일상은 또 어떤가? 로키에게 일상 역시 그다지 즐거운 곳은 아니다. 파로키는 일상 또한 지배자의 감시의 눈길아래 있음을 옷깃을 당기는 여자에게 아무런 리액션을 할 수 없는 다른 여자의 상황을 설명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암시한다. 그러나 일상이 고단한 이유는 지배자의 감시와 같은 사회구조적 억압에 있다기보다는 바우만(Zygmunt Bauman)이 말한 바, ‘욥기만 남기고 모조리 생략된 복음서와 같은, 아무런 이유 없이 삶과 죽음, 행복과 고통이 일어나는 인생 때문이다. 노동과 일상을 경계 짓는 문, 그러나 그 분리 혹은 단절은 인간의 바램일 뿐 어디에서든 인간의 삶은 고단하고 불확실하고 불투명하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다. 파로키의 작품에서 수용소처럼 무거운 공장 철문을 사이로 반대편 삶의 고통을 바라보는 양쪽 모두의 무의식적이고 힘없는 시선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 눈빛을 통해 파로키는 인간의 삶에 감춰진 폭력과 억압의 메커니즘이 정권, 지식인, 노동자 등이 얽힌 지배관계의 힘의 역학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부조리에 있다고 말한다. 파로키는 이러한 발언을 커다란 짐을 지고 가는 동료 노동자를 바라보는 실직 노동자들의 기대 섞인 시선과 (그가 쓰러져야 하나의 일자리가 생긴다) 급기야 그 노동자가 힘에 겨워 쓰러졌을 때 그 일자리를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관리자의 무감각한 시선을 번갈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으로 강화한다. 편파 혹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 편에 서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는 파로키의 시선은 어느덧 관람자의 것이 되어 자신을 마주보게 한다. 파로키의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을 보고 난 후 가슴이 먹먹한 건 이러한 내적성찰의 요구 때문이다.


세상을 향한 객관적인 관찰과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파로키의 작품은 공장 문을 떠난 사람들의 이후 삶에 사랑, 실직, 기아, 범죄, 전쟁, 죽음 등으로 범벅이 된 더 많은 사연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의미 있지만 협소한 사회비판의 장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존재론적 사유의 바다로 나아간다. 이는 파로키의 첫 번째 영화, <꺼지지 않는 불(Inextinguishable Fire)>(1969)의 사회비판적 시각이 인간 본질의 문제로 진보한 시선의 성숙이다. 이는 <먼 곳에서의 전쟁(War at a Distance)>으로 알려진 <인식과 결과(Erkennen und Verfolgen)>(2003) 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며 유지되는 파로키의 철학적 사유이다. 이는 파로키의 작품을 여타 사회비판적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조롱과 시비의 가벼움에서 건져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유는 현실을 관념으로 치환하여 문제 해결을 지연시킨다는 비판에 부딪힐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 문제의 해결책 제시나 해결의 주체로서 가하는 행위보다는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고 고민하게 하는 예언자적 묵시에 있다고 볼 때 이는 정당하다.   


파로키가 노동과 인간의 문제를 발언하는데 사용하는 중요한 방법은 뤼미에르, 채플린 등 필름의 역사에서 재현된 공장과 관련된 영상의 반복이다.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에서 반복되는 공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과거의 특정한 사건을 정지 상태로 놓고 이를 현재에 반복하여 구성함으로 의식의 각성을 유도하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변증법에 닿아있다. 파로키는 과거의 이미지를 현재에 반복하여, 노동을 중심으로 한 인간 사회의 갈등의 뿌리를 탐구하고 지금, 여기의 문제로 현재화한다. 필름을 매체로 한 이러한 반복은 안체 예만(Antje Ehmann)과 합작한 <노동을 비추는 싱글 쇼트(Labour in a Single Shot)>(2013)에서 뚜렷이 나타나지만 성찰에 이르게 하는 효과는 역사성의 결여 탓인지 <공장을 떠나는 노동자들>에 비해 미흡하다.

 


집요한 반복은 무겁다


아모스 보겔(Amos Vogel)이 언급한대로 영화는 격세 유전의 기억과 무의식적 욕망에 뿌리를 둔 현대의 제례 의식(ritual)이고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되어 어둠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제단이다. 이미지의 권력, 이미지에 대한 공포, 이미지의 전율은 실재한다. 눈을 감아 버리지 않는 한(영화에서 이런 행위는 전례가 없는 곤란한 일이다) 그것에 저항할 방법은 없다.” 몽타주는 이미지의 압축이며 응축이다. 압축과 응축은 강렬하다. 거기에는 집요한 반복이 있다. 강렬한 반복인 만큼 판독을 위한 사유의 긴장은 지속적이고 하중은 무겁다. 관람자는 그 무거움을 견딜 재간이 없기에, 따라서 <필름 몽타주>전에서 한꺼번에 여러 작품을 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고 권장할 일도 아니다. 누군가 <필름 몽타주>전을 보러 간다고 하면 나의 경험에 비추어 이렇게 말하겠다. “먼저 무심히 그러나 촉각을 세우고 천천히 돌아보세요. 그러다 어느 작품 앞에 시선이 머물면 그 축적된 이미지의 제단 앞에 사고의 촛불을 켜세요. 그리고 당신 안에 움트고 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시선이 열리기를 기다리세요. 촛불이 다 탈 때까지, 가슴으로 오래도록.”    

 


* 쇼반 데이비스+데이비드 힌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 2012 50' 싱글채널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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