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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03, Apr 2015

트라우마의 기록

2015.3.6 – 2015.5.17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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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주 아르코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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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으로 기록된 기억의 방식, 트라우마의 기록 



‘기록한다’는 행위가 어떠한 정보를 특정 신호로 남기는 것이라고 할 때, 그 기록의 지시대상은 인식체계 내에 존재한다. 반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이후 심리적 상처로 통용되고 있는 트라우마(trauma)는 인식영역 외부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과 징후들로 나타나며, 유사경험과 특정 계기를 통해 사후적으로만 발현된다고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트라우마의 경험 이후 자아의 존립 자체에 위협을 느끼게 된 개인은 다양한 방어기제로 그 기억을 제거하거나, 어떻게든 개인사의 기록에서 배제시키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기록한다는 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가능한가라는 호기심, 여기에 덧대어 기록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선형적 시간성이 과연 비가시적 영역에서 복잡한 결을 이루는 트라우마를 담아낼 수 있을까하는 일종의 의구심을 갖고 전시경험을 시작했다. 

 


‘민족’, ‘재난’, 그리고 사회가 남긴 심리적 외상 


전시는 보다 집단적인 트라우마를 다룬다. 성과위주 경쟁체제의 한국사회 속에서 개인의 특수성은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그 소통의 방식을 상실한 채 심리적 상흔을 남긴다. 또한 반세기를 지나며 한국사를 관통했던 굵직한 사건들 역시 세대를 이어오며 다종다양한 트라우마의 징후들로 사회체계와 개인의 삶의 방식에 그 족적을 남기고 있다. , 개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불행한 사건사고들, 경험의 왜곡된 역사서술, 여러 이해집단의 팽팽한 대립과 갈등으로 형성된 사회구조는 개인의 삶에 불가항력적 힘을 발휘하며 반복강박과 공포, 불안, 우울, 무기력함 등의 형태로 그 증후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전시는 집단 트라우마의 실체, 그리고 그 증후의 표상을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몇 개의 키워드로 범주화하고 있다. 

 

1980년대 리얼리즘 미술운동의 가운데서 민중미술을 이끌었던 작가 중 한명인 임옥상의 작품 <6.25 이전의 김씨 일가> <6.25 이후의 김씨 일가>는 본 전시의 첫 번째 작품이다. 두 작품간 여백에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남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담겨있고, 좌측의 평범한 가족의 모습은 그 여백을 지나며 부재자들의 실루엣만 남긴 채 평범함을 상실한 비극적 사건의 표상이 된다. 이어지는 손기환의 는 똘이장군, 소년장수바우, 캡틴아메리카의 이미지들로 표현된 선전용 포스터 같은 회화를 흥미롭게 배치하여 첨예하게 대립되는 각 국의 이데올로기를 보다 극명하게 대치시킨다. 


마주하고 있지만 결코 소통될 것 같지 않은 미국과 북한을 대리하는 두 수장의 이미지는 분단의 현실과 이를 둘러싼 이해망들에 대한 은유로 기능하며, 한국의 현실이 놓인 상황을 일갈하는 듯 하다. 두 작품을 관통하는 분단의 상황은 오형근의 군인 사진이 불러일으키는 섬뜩함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특정 집단, 그 정형화된 이미지를 사진으로 포착해 온 그의 군인 시리즈는 사회적 상황과 요구에 따라 그에 적합한 형태로 기능하기 위해 개별적 존재의 가치가 말살된 특정 집단, 그리고 그들의 심리적 상흔을 은폐하며 드러낸다. 오형근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 전시구성을 통해 독립적으로 주어지면서 불가항력적인 집단의 생성과 개별자들의 공포가 충돌하는 방은 그 섬뜩함이 배가된다.

 

전시는 이렇듯 트라우마의 하위 주제로 집단 트라우마를 다룬다. 그리고 전시장의 초입을 채운 이들 작품은 또 다른 하위 주제인 민족이라는 범주로 묶여있다. ‘한국전쟁 이후 분단 상황에 놓인 한국인에게 남아있는 트라우마가 당대의 경험자들 뿐 아니라 이후 세대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사적 트라우마 양상을 띠며, 예술작품을 통해 그 민족의 한과 트라우마를 재현한다는 취지다. 거대담론과 이념을 담지한 민족이라는 본 섹션명이 가져오는 부담은 차치하고, 몇 작품으로 호출되는 비극적 역사, 그리고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파생되며 사후적으로 생산, 재생산되는 심리적 통증은 영상과 사진작업을 주로 하는 최원준의2011년 작 에서도 이어진다. 


앞선 작품들처럼 분단이라는 상황자체를 가시화하진 않지만, 집단 트라우마로 남겨진 군부독재시절의 불안과 공포를 현재로 소환하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졌거나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거부할 수 없는 힘, 그 존재 자체를 철저히 은폐시키는 방식과 방어기제들로 망각의 영역에 저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의 작업의 큰 줄기는 한때 호황을 누렸던 철강 제조업단지였던 문래동의 사회역사적 특수성을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태로 다루는 것이지만, 픽션의 내러티브를 통해 특정 인물의 망령을 재현하는 지점에서는 심리적 포획마저 일어났다. 그리고 허구적 상황이 주는 위안은 이내 이어지는 몇 컷의 사진들, 영화적 공간을 담은 흑백사진으로 인해 파기되었다. 




전시전경(임옥상 작)


 


한편, 이제 며칠 후면 국민 모두를 공포와 분노로 치닫게 했던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약 일 년이 된다. 급작스럽게 발생한 불가피한 자연재해였다면 이 정도의 집단 트라우마 증상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상황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고, 수장되어 가는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시기. 국가에 대한 불신과 사후처리 방식에 대한 분노가 아이들과 함께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던 때, 그에 따른 무기력함과 우울증은 급속도로 치솟고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심각한 사건 이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만큼 반복되는 고통과 징후들을 수반한다. 강박증, 무기력함, 죄의식, 자아분열, 회피와 방어기제에 의한 무감각증, 그 형태와 성격도 다양하다. 네 명의 작가 홍원석, 김윤경숙, 이혜인, 전채강은 재난이라는 타이틀 하에서 이러한 증상들, 고통과 불안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김윤경숙과 이혜인의 작업은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자들에 대한 위령제이자, 개인과 사회에 넓게 퍼져있는 상처의 흔적을 망각하거나 없애지 않고 오히려 들춰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마치 뒤집혀있는 배처럼 매달려있는 전구다발에, 꺼져가는 생명처럼 명멸하는 <하얀 비명>의 불빛 앞에서는 숨쉬기조차 어려운 심연 한 가운데 멈춰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자신을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품을 통해 전해지는 마음의 잔재는 비현실적 현실 앞에서 공감의 손을 내밀었다. 개인적 경험에서 기인한 트라우마를 강렬한 색과 설치구조물로 표현하는 김윤경숙의 작업은 그 작업스케일과 성격 때문에 관객의 신체적 공감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홍원석과 전채강의 작품은 트라우마의 비가시적 실체 즉,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그 기괴한 형상을 회화적 현실로 드러낸다. 차가 질주하는 도로의 균열, 갑자기 등장한 싱크홀은 우리 안에 내재된 트라우마의 모습이며, 일상을 담아낸 화면 구석에 배치된 사건, 사고들은 언제든 실현될 수 있을 잠재적 재난으로 우리의 불안이 머무는 거처다.  

 

트라우마의 증상 가운데 앞으로 어떤 유사경험이 도래할 지 알 수 없음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가 있다. 불안은 재앙으로 인한 충격을 일정부분 와해하기 위한 완충제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마치 자살충동이 심한 사람들이 오히려 고소공포증을 동시에 겪으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충동을 방어하는 것처럼, 불안이라는 심적 상태는 다가올 공포에 대한 사전 장치들을 미리 마련하도록 한다. 노해율의 키네틱아트와 전윤정의 테이핑작업은 이러한 불안을 동력으로, 전자는 어떤 무형의 사회구조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반복적인 움직임을 지속시키는 개인의 모습을 닮았고 후자는 특정 행위의 지속을 통한 해소의 길을 모색하는 듯하다. 


한편 상기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보다 직접적 사건을 지시대상으로 트라우마의 기억을 공감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반면, 김상돈은 현대사회에서 드러나는 트라우마의 비가시적 실체, 그 부재적 성격을 잘린 종이를 이어 붙여 만든 기념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이를 촬영한 사진작업을 통해, 서동욱이 말한 표상이 부재하는 자극인 트라우마의 속성처럼 직접적으로 환기되는 지시대상이 없는 곳에서 자극들로 주어진다. 한편 혼돈 속에서 현실을 표출하고, 나와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아낸다는 문기전은 개인의 인식 너머에서 존재의 존재성에 위협을 가하는 실체의 폭력성을 자극적 색채로 담아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5.18 희생자들의 옛 묘역에 있는 빛바랜 영정사진을 담아낸 노순택의 작품은 마치 트라우마를 양산한 사건과 상황들에 무감각해지고 점차 잊혀져가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경종처럼 느껴진다.  

  


대체기억에서 집단기억, 그 공감의 영역으로 


큐레이팅을 통해 구획된 공간구성과 배열순으로 작품을 마주하다보면, 분명한 섹션구분의 의미가 모호해지는 작품들이 있다. , 작품을 둘러싼 여러 해석의 레이어들이 겹치고 충돌하면서 일정 부분 주어진 범주화에 작위적인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는 흡사 트라우마의 존재성 자체가 애당초 인식의 영역을 벗어나 구조 자체의 비체계성에서 오는 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트라우마의 본성처럼 겹들이 쌓이거나 분열되는 방식으로, 보다 덜 체계적인 방식의 전시 구성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정갈하게 나뉜 트라우마의 기록화대신 작품과 작품, 공간과 공간 사이의 연결고리들이 다양해지고, 보다 다양한 해석의 얼개가 생기고, 그 혼란의 틈을 타 개인의 유사 경험 혹은 추체험이 더욱 활기를 찾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로 인해 전시장을 나오면서 얻는 총체적 경험이 보다 복잡하게 얽힌 공간구성을 통해 트라우마틱하게 신체를 찔러댄다면 그 여운이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 물론 전시기획의 유경험자로서 부족한 예산이라는 복병은 분명 기획방향을 한정지었을 것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몇 가지 테마로 정리된 전시 방식에 다소 친절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를 접근할 때 일반적인 전시방식, 즉 지극히 개인의 심리적, 정신적 상처를 근거로 그 발현 양상에 천착하는 전시들이 작품과 작가로부터 관람객들의 심리적 거리감을 일정부분 당연시하고 있는 반면에, <트라우마의 기록>전은 집단 트라우마라는 화두로 관객들과 작품 간의 심리적 이해와 공감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가 좋았다. 더욱이 우리의 상흔이 탈은폐되고 회귀되는 방식으로 말이다. 전쟁, 분단, 군부독재 시절 등 질곡의 시절을 실제로 겪었던 특정 세대뿐 아니라, 남아 있는 자들, 추정을 통한 간접 체험을 겪는 이후 세대까지 그들이 지닌 일부 상흔의 흔적은 기록화를 통해 교감과 그 해독의 가능성이 열렸다. 나아가 세월호와 같은 재난 이후 각양각색으로 심리적 스트레스를 안고 있는 현대인에게 트라우마의 정체는 더 이상 회피대상이 아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적절히 마주하고, 트라우마를 안겼던 막연한 실체들이 찔러대는 자극 앞에서 의식적으로 깨어있어야만 한다. 개인적 트라우마에 있어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이 대체기억으로 그 심리적 외상을 흔적조차 지우는 방식이었다면, 집단적 트라우마의 기억방식은 그 실체를 바라보고 공유하며 공감의 과정을 겪는 것이다. 서로의 몸과 마음에 새겨졌던 상처의 흔적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형태로 말이다. ‘잊지 않겠다며 마음속에 되새기던 그 시기, 온 몸에 퍼져갔던 고통의 전율이 다시 한 번 심신을 휘감았다. 무감, 무통에 점차 익숙해지는 지금, 이것은 분명 유쾌한 고통이었다.  


 

김윤경숙 <망상의 침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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