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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희_거기 계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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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11 - 2023.11.19 아르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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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계셨군요”하고 인간을 알아보게 하는 이미지:
노원희의 그림


캔버스를 든, 빗속에서 절규하는 예술가, 독재와 저항의 시대에서 자란 ‘아이’, 야바위판을 에워싼 구경꾼, ‘긴급뉴스’를 텅 빈 눈으로 관망하는 정치가, 군인, 회사원, 그 시간 ‘심리전’을 벌이는 ‘공무원’, 공원을 떠도는 사람, 갑갑한 세상 속에 ‘아침 운동’하는 사람, 고단한 삶에 ‘라면 먹는 사람’, 사라지는 사람, 싸우는 사람, ‘참전’한 ‘밥상 깨는 남자’, 그의 ‘맏딸’과 부인, 무력한 국가의 사람, 프라이팬이라는 ‘무기를 들고’ 선 사람, 피켓을 든 사람, 산업 금자‘탑’이 된 사람, 그 탑을 세운 큰 회사의 사람, ‘화력발전소’의 노동자, ‘사복으로 갈아입’힌 산업재해 피해자, 과로사 한 사람, 일하다 한 팔과 한 다리를 잃은 ‘씩씩한 청년’ 생존자, ‘보호자’, ‘국가의 무력’에 맞서 저항하는 ‘말의 시작’이 된 사람, ‘근본불안’ 속의 사람… 이 모든 사람들이 다 ‘거기 계셨군요’라는 제목으로 모여 최근 아르코미술관에서 전시된, 그려진 시기로 따지면 1980년부터 2023년까지 40년을 아우르는(전시작 수는 연작을 1개로 쳐도 66점에 이르는) 노원희의 그림은 이렇게 여러 사람을 그려낸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앞에서 따옴표로 표시한 것은 직접적인 작품 제목인데, 이름 붙이지 않았더라도 이보다 더 많은 수의 서로 다른 인간의 초상(형상)을 노원희의 그림에서 계속해서 찾을 수 있다. 노원희가 인간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렸기 때문이다. 이것의 의미를 단지 생생한 인체 근육이나 관절의 묘사 또는 본뜬 듯한 얼굴 인상의 표현으로 완수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인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재현은 무엇인가.


유구한 미술사 속 수많은 작품에 인물이 등장하지만, 주로 권력자나 성인을 그린 그 작품들이 과연 인간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가? 이후 근현대의 ‘미술’은 인간을 이미지로 옮기는 일을 어떻게 해냈던가? 작가 또한 참여했던 현실과발언과 같은 민중미술 또는 현실주의 계열이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그려내긴 했지만, 인간의 이미지를 알아보게 하는 일에 있어 이러한 미술운동이 가진 효과는 카메라의 시선이 가지는 것에 비하면 미약할 수밖에 없긴 하다.

더 반성적으로 돌아보면, 대다수 그림들의 어떤 속내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을 감추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지금의 무수한 미디어가 생산하는 인간의 이미지는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이 모든 사람을 잘 그려내고 있는가? 예를 들어, 산재 피해자의 이미지를 화면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가 말이다.



<자화상 95(자화상 2)> 1995 
캔버스에 아크릴릭 73×100cm



도대체 인간은 어떤 이미지로 그려져온 것인가? ‘인간'이라는 이미지에 선망이라는 자본을 삽입하는 한편, 여전히 누군가를 누락하지 않는가? 이런 와중에 정말 알아보아야 하는 인간의 이미지는 누구의 모습인가? 미술사학자이자 이미지 평론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이 지적한 대로, 과거이든 지금이든 여전한 과잉 노출과 과소 노출의 중첩 속에서 인간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름 없는 이들을 재현 속으로 끊임없이 당겨와 드러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이 비가시적 존재들을 이미지 속에 누락하지 않고 기입(기록)하는 일. 앞서 읊조리며 호명한 사람들의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 노원희는 보기 드문 시종일관 이 책무를 자발적으로 실천한 작가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나열만 했다고 인간의 이미지를 나타나게 하는 그림을 충족했다 하는 것은 빈약한 논리이다. 노원희의 그림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짧게 몇 가지 들어보면, 그의 작품 중 예외적으로 알려진 투쟁가를 그린 <37년>(2022)은 이름 없이 죽어간 동료의 사진을 들고 선 모습의 한 사람을 보여준다. 이렇게 인간의 이미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영웅을 찾거나 영광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 앞에 선 한 인간이 그저 그와 같은 다른 한 인간을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가능해짐을, 노원희의 그림은 말한다. 말. 그렇다.


노원희의 최근 그림은 형상보다 말에 더욱 천착하는 것으로도 보이는데, 그 때문에 그림이 약해진 것은 아닌가 따져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포스트잇을 붙인 듯이 화폭에 많은 산재에 관한 증언을 글로 옮긴 신작 <사복으로 갈아입히고>에서 그 말하기의 역할은 형상을 밀어내는 대신 이미지와 동시적으로 작용하며 인간의 이미지에 해상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단적으로, 상이군인의 코가 깨지고 입이 없어진 옆얼굴을 찍은 도판에 “전쟁에서 ‘깨진 입’”이라는 명제가 없다면, 당신은 그 인간의 이미지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잘 그린 그림보다 사실적인 사진 매체에서조차 잔인한 기형의 신체 이미지 말고 어떻게 인간의 이미지로서 시각성을 알아볼 수 있을까. 언어와 이미지의 비판적 상보 관계 없이 말이다.  
 

* <89회 신이여 두 사람을 축복하소서> 2007 캔버스에 아크릴릭 33×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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