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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93, Jun 2014

공공미술 기획 평론 ③

How to define the events
not producing
a symbolic order

상징질서를 생산하지 않는
사건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커뮤니티아트는 장소와 공간 그리고 인간과 예술작품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이데거적 의미의 건축함을 속성으로 갖는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짓는 건축함이자, “밭을 갈고 포도를 재배하는” 것과 같은 돌보고 보호하는 건축함이다. 이것은 세계를 재현하는 예술과의 ‘실제적인’ 결별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세계를 재현하는 매체이고, 전시는 다시 전시의 세계를 재현하는 내러티브를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재현적이다. 따라서 예술은 이중적으로 아니 그 이상의 겹으로 재현적이다. 전시의 가치가 예술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록 예술은 더욱 견고하게 재현적이 되었다. 그러나 커뮤니티아트는 재현을 속성으로 갖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어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흐름과 운동만이 이 예술을 발생시킨다. 이 흐름은 게다가 선형적이거나 혹은 균질하거나 동질적이지 않은 운동들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그것은 매우 우연적이거나 개별적인 것으로 드러나기 쉽다. 발생된 ‘사건’이 되는 이 예술들을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이다. 그렇다면 상징 질서를 생산하지 않는 사건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 기획·진행 안대웅 기자 ● 글 현지연 미학·미술비평가

2013 헤이리 판 문화축제 슬로우아트 갤러리 연합전에 출품한 박찬국의 '11분 11초'. 작가는 헤이리라는 생태문화마을 브랜드의 이중성에 주목했다. 부동산 투기로 방치된 땅에 모기장을 설치하고 벌레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동시에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시간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11분 11초 동안 마음대로 드로잉하거나 글씨를 쓰도록 했다. 일상생활에서 시간과 공간 개념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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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연 미학·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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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공공미술 평론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러한 갈증을 풀기위한 시도의 한 편’으로 청탁되었다. 문제 제기는 공공미술 담론이 그간 풍부하지 않았던 것은 평론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담론은 정보가 계속 전달되어 저장되고 보관되고 그것이 의미망을 만들 때 형성되는 것이다. 담론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대화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저장될만한 정보가 만들어지는 것은 분명 대화를 통해서이다. 대화는 선행된 정보들이 서로 결합되고 우연히 만나고, 부딪치면서 이어진다. 그리고 담론 역시도 하나의 담론은 또 다른 담론들과 중첩되고 충돌하면서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런데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들이 분명히 상당수 있어왔음에도 왜 우리는 담론의 부재를 여전히 말하고 있는가? 프로젝트마다 대화는 이어졌고, 간혹 비평이 개입을 했으며, 정책적인 비평(모니터링의 형태로 계량화되는 비평)도 이어졌다. 그런데 왜 아직도 평론의 부재를 말하는가? 

발생적인 사건들을 설명하는 담론은 발생적인 혹은 사건적인 담론들이 산출되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는 제도화된 담론을 요구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의 권위적인 혹은 전체적인 시각의 담론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커뮤니티아트가 실제적인 어떤 결별을 이루어 내듯이 그것을 설명하는 언어도 어떤 결별을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시도들이 참여, 관계, 태도, 형태, 장소들과 관련되어 논의되었지만 그러한 언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구체적인 대상들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대상은 전언했듯이 장소와 공간 그리고 인간과 예술작품 사이에서 발생하는 커뮤니티아트이다. 이 구성체들은 하나도 빠짐 없이 고려해야 할 것들이다. 그것은 커뮤니티아트 안에서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것들이 아니므로 모두 고려되어야 하는 존재조건들이다. 때로 커뮤니티아트에서 예술작품이 어떤 것이냐의 논의들은 ‘물리적 예술품은 사라지고 그러므로 미학적 평가는 불가능하다’는 비약적인 논리로 빠져 버린다. 그러나 예술작품을 정의하는 것 역시 다른 조건들과의 관계들에서 발생한다. 예술이 어떻게 있는가, 어떻게 거주하는가를 살피는 과정에서 예술작품은 스스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논아트밭아트> 프로젝트 중 카페 C 전경




하나의 예를 보자. <논아트 밭아트(Non Art But Art)>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광능내 일대의 시유지 2,000평의 땅에서 이루어진 프로젝트이다. 2010년 경기문화재단의 새로운 주문자 사업으로 선정되 2011년 한 해동안 지역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는 논농사, 밭농사를 포함하여 주민들과 함께하는 마을 학교, 재활용 공작소 등이 운영되었고, 다양한 문화적 활동들이 기획되어 진행되었다. 물론 작가들의 작업적 참여도 이루어졌다. 오리 농법을 통해 농사를 지었으나 수확은 좋지 못했다고 했다. 이 초짜 농부들에게 농사가 만만했을리 없다. 게다가 <논아트 밭아트>가 주목한 것은 잡초의 아름다움이었다고 하니 그들이 폐기시킨 것은 잡초 뽑기 대신 목표 지향적, 성과주의적 가치관이었을지도 모른다. 논에 세워진 붕어와 오리를 위한 <코르뷔지에 오붕지>에는 오리들이 타고 내려 올 수 있는 미끄럼틀을 놓았다. 마을학교에서는 커뮤니티, 삶, 예술에 대한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학습과 대화의 장을 열었고, 이주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의 특성을 활용한 요리 프로그램은 물론, 사진찍기, 가드닝 등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졌다. 

<논아트 밭아트>는 대외적으로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예술적 시도로, 이질적 도시 구조를 갖고 있는 공간 안에 개입하는 예술적 기획으로 ‘평가’되었다. 평가는 실은 매우 중성적인 것들이었다.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잘된 것인지, 어떤 효과를 만들었는지 혹은 어떤 경험이었는지는 ‘분기된’ 담론 속에서 중성적인 언어 안에 머물렀다.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인 박찬국 작가의 글이 가장 근거리의 평가이기도 했는데, 그는 <논아트 밭아트>가 “다양한 이해 관계의 갈등구조, 가능성이 얽힌 지역의 상황과 만나며 처음에 의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1)고 평가했다. 의도하지 못했던 혹은 예상치 못했던 일은 시작부터 있었다. 프로젝트를 시행하려는 땅과 관련된 사람들의 강한 반발은 프로젝트의 변형을 불가피하게 했고, 결국 천 평의 논에서만 이루어진 이 프로젝트는 내내 프로젝트의 활성화를 막으려는 폭력과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동대문옥상파라다이스> 프로젝트.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는 동대문의 다양한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예술적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그런데 “의도하지 못했던 방식의 마무리”는 그렇다면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평가인가? 박찬국 작가가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작가적 입장의 평가에만 머무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커뮤니티아트의 결과들을 평가하려고 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커뮤니티아트의 비평을 위해서는 근거리 비평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커뮤니티아트에 대한 인식론적 평가나 계량적 평가는 큰 의미 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드러난다. 그러므로 작가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은 물론 많은 경우 자족적인 혹은 자폐적인 말하기가 되기도 하므로 이를 경계하는 것은 필요하나, 작가의 목소리가 스스로 말하는 것은 담론 형성의 기본적인 근간이 된다. 동시에 우연하게 산출된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역시 필요하다. <논아트 밭아트>의 경우 ‘갈등’을 통해 “마을 내부의 권력 구조들이 드러나고 공공성과 사익의 관계, 리더십 문제, 개인들의 관계망이 유지되는 형태들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논아트 밭아트>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타난 결과들이고 사유들이다.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나고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이러한 프로젝트의 예상치 못한 효과들이다.

앞서 우리는 커뮤니티아트의 속성을 하이데거적 의미의 건축함이라고 했다. 그것은 물론 ‘어떤’ 커뮤니티아트에만 적절한 표현이다. 하이데거는 고대 독일어의 건축함(bauen)이라는 말이 은닉하여 갖고 있는 의미를 통해 건축함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고대어 건축함은 “있음(bin)”을 의미하며, “나는 있다 혹은 너는 있다라는 것은 나는 거주한다 혹은 너는 거주한다를 의미한다.”2) 거주함은 단순한 있음은 아니다. 거주함이란 “통상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며 다양하게 관계 맺는] 여러 가지 [삶의] 태도방식들과 아울러 또한 수행해나가는 하나의 태도를 표상한다.”3) 거주함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수행적인 존재방식이며 거주함으로서의 건축함은 “성장을 돌본다는 의미에서의 Bauen으로, 또 건축물을 건립한다는 의미에서의 Bauen으로 전개된다.”4)  건립으로서의 건축함은 거주함을 시원적으로 근거 짓는다. 건립은 이 경우 구체적인 건축의 지음부터 탁월한 형식의 시 지음으로서의 건축함이다. 제작함 (Herstellen) 이 아닌 건축함은 “밭을 갈고 포도를 재배하는” 것과 같은 돌봄으로 하이데거에게 돌보고 보호하고 거두는 농부와 같은 행동은  거주함을 배울 수 있는 사유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해방 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이 무허가로 점거하면서 

생긴 달동네 중림동은 재개발 위기에 놓였다. 
박찬국은 재개발의 부산물을 가지고 와 그 기능을 
예술적으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진은 <중림동 이야기정원> 전시 광경



커뮤니티아트가 삶의 방식을 세계와 사물, 예술 사이의 관계 안에서 탐구하고 개시하는 것이라면, 건축함의 두 전개를 통해 커뮤니티아트를 설명하고 그것이 거주함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논아트 밭아트>는 그것이 생태적 공공성과 삶에 대한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적절한 예가 된다. 그것은 “예술이 아니지만(non art) 예술인 것(but art)”인 예술 자체에 대한 농담을 시작으로 그것이 세계를 재현하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실제 세계에서 발생하는 예술임을 시사한다. 물질적 예술대상을 만드는 것에는 소홀하지만, 그것은 땅이라는 건립의 기반을 갖고 있다. 그곳에서 예술은 예술이 아닌 형태지만 예술인 것으로 건축함의 두 운동을 통해 발생한다. 이 운동은 땅을 갈아 엎고, 건물을 짓고, 프로그램을 짓는 건축함과 지역과 주민, 예술가, 오리, 붕어, 허브, 잡초를 보살피고 보호하는 건축함을 모두 그 특성으로 갖는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사건은 생생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권력적이거나 지배적인 어떤 체계의 삶과 다른 질서를 산출하는 것이며 생생한 예술적 경험이고 보다 “본래적으로 거주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여자의 존재론적 선택과 참여, 행동에서 그 구체적인 평가가 가능할 뿐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거주함이 발생하였는지는 이들 덕분에 생생하게 증언된다. 우연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이 평가를 모호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술의 존재를 드러내고, 대화를 시작하게 하는 다른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에서 대화는 단순히 말이 오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장소가 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대화는 예술을 장소-특정적 예술이라기 보다는 장소로서의 예술이 되게 한다. 장소는,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대화 앞에 이미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 어떠한 곳에 여러 위치들이 존재하는데, 이 위치들을 장소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하이데거에게는 사물, 여기서는 대화가 된다. 사물을 통해 비로소 “사방을 결집하며 모아들이는” 장소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소들로 존재하는 사물들이 그때그때마다 비로소 공간들을 허락한다. (...) 공간이란 본질적으로 마련된 곳(das Einge raumte[어떤 것을 위해 치워져 자유롭게 마련된 자리]), 즉 자신의 경계 속으로 들여 보내진 곳(das Eigelassene[허락되고 허용된 곳])이다.5)” 이렇게 마련된 자리는 따라서 무엇인가, 어떤 것이 시작되는 곳, 결집하고 모아들이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인간과 “본질적으로 사유된 거주함”이라는 관계를 갖는다.6) 



논아트밭아트 시즌2’라고 할 수 있는, 박찬국과 

청년허브 듣보잡 문화반의 <노들섬 프로젝트>. 
이들은 노들에서 텃밭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땅을 
조금씩 떼어 받아 ‘빈대 텃밭’을 만들었다. 여기서 
작물을 키우고 목공과 요리를 배워가며 ‘버들 카페’를 열었다.



커뮤니티아트에 있어 장소의 산출을 통해 이루어지는 공간은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장소가 건립되고서야 비로소 예술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터를 마련하고, 무엇인가 돌보고,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커뮤니티아트도 장소가 되지 못한 채 개시될 수 없다. <논아트 밭아트>가 마련한 장소에서 예술은 그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어 갔다. 장소가 된 대화나 사물이 없었더라면 광능내의 시유지 천 평은 가장 진부한 그런 공간으로 남았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장소는 실제적인 장소이며 어떠한 관습적인 상징 질서를 산출하는 장소가 아니다. 상징질서를 재현하지 않는 커뮤니티아트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커뮤니티아트는 장소를 개시하는 기술과 그것이 산출하는 것을 통해 우리를 “시적으로 거주하게” 할 때 가장 탁월한 거주함을 드러낼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커뮤니티아트를 설명하기 위해 산출해야 하는 언어는 예술만큼 계속해서 건립되고 지어지고 돌보아야 하는 건축함, 사유된 거주함을 본래적인 것으로 삼으며 시적으로 거주하게 하는 그런 언어를 통과해야 할 것이다.  

[각주]
1 박찬국, “이천부지 이천평 분투기”, <컨템포러리아트저널>, vol.13, 2013, p. 92
2 마르틴 하이데거,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강연과 논문>, 이기상, 신상희, 박찬국 역, 이학사, 2008, p.187
3 Ibid., p. 186
4 Ibid., p. 189
5 Ibid., p. 198
6 Ibid., p. 203



글쓴이 현지연은 한국과 프랑스에서 철학과 미술사를 공부했고 예술 매개자를 교육하는 예술기획 에꼴을 졸업했다. 전시학으로 학위를 얻었고, 문화와 기술, 사회의 변화에 따른 예술의 존재론에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글쓰기와 강의 등을 하고 있으며 미학을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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