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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157, Oct 2019

양혜규
Yang Haegue

다중 감각의 장

“시간이 없는 세상에는 시간의 순서, 미래와 다른 과거, 유연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여전히 우리에게 익숙했던 시간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우리의 시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위해, 우리 주위에, 우리의 척도에 맞게 나타나야 한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모든 장소에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심리적인 반응이나 문학적 비유일 뿐 아니라 물리학적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도 유의미한 논의 주제다.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세상에 대한 근사치의 근사치의 근사치”이며 “서로 다른 다양한 근사치들에서 파생된 확연히 구분되는 수많은 특성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 구조의 복잡한 개념, 이것이 우리의 시간이다”라고 말한다. 2019년 9월의 서울, '서기 2000년이 오면'이라는 전시의 한복판에서, 나는 로벨리 문장 속 ‘시간’을 제법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고, 동시에 그 단어를 ‘양혜규의 작업’으로 슬쩍 바꿔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 이가진 프랑스통신원 ●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서기 2000년이 오면' 설치 전경 국제갤러리 3관(K3) 양혜규 개인전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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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진 프랑스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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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리움에서의 개인전 <코끼리를 쏘다, 코끼리를 생각하다> 이후 4년 만에 열린 <서기 2000년이 오면>전은 일관성보다는 생소한 요소들이 두드러진다. 그중에서도 전시의 인트로이자 감각의 촉매로 작동하는 옛 유행가와 작가가 어린 시절 동생들과 함께 그렸다는 스케치북 그림이 가장 부각된다. 갤러리 입구에서 들려오는 <서기 2000년이 오면>(1982, 민해경 곡)의 진취적인 흥겨움에 익숙해질 겨를도 없이 수채 물감과 크레파스로 그린 <보물선>(1977)의 천진난만함은 양혜규의 작업에 가졌을 기대감이나 예상 따위를 보기 좋게 뭉갠다. 대중가요나 어린이 그림 자체의 새로움보다는 기존에 알려진 작가의 조형 언어와의 거리감 때문에 혼란은 가중된다. 그는 이런 요소들을 작품으로 포함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 하지 않았다. 양혜규의 라인과 맞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무엇이 중요한가? 사람들이 전시를 봤을 때 영감을 주는 게 중요하지 않나?라고 되묻는다. 그러나 이런 노스탤지어의 감성만으로 이번 전시의 전부를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추억이라는 외피 아래에 잠겨 있는 시제와 시점, 시간과 시간성을 건져낼 때 우리는 작가의 진짜 메시지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Sonic Coupe Copper  Enclosed Unity> 2019 

Powder-coated aluminum frame, powder-coated metal grid,

 ball-bearing, brass plated bells, metal rings, casters 212×110×110cm 

Courtesy of the artist 사진: 양혜규 스튜디오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양혜규가 무심하게 던진 가느다란 화두를 꼭 쥐고 미궁에 뛰어들면 그곳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시간대가 벌려져 있고, 그 틈에 집약적으로 배치된 향, , 소리 등의 요소를 목도하게 된다. 개별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여백 없이 빽빽하다. 신인 시절부터 항상 너무 뭐가 많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다는 작가는 당시엔 밀도가 높다는 표현이 칭찬이 아니라 흠으로 여겨지던 때였다고 기억한다. 그의 말마따나 작가의 본래적 특성일지 모를 꽉 찬 느낌 그대로 섹션의 구분도 없고 가벽이나 기둥 하나 없는 올 오버(all over) 속을 누비는 관람객에게 시간과 공간은 자비 없이 쏟아진다. 벽의 전면을 벽지로 렌더링한 <배양과 소진>(2018)은 압도적인 환경 조성의 중심에 있다. 2018년 프랑스의 라 파나세 현대예술센터(La Panacée-MoCo)에서 이미 공개한 바 있는 이 작업은 독일 그래픽 디자이너 마누엘 래더(Manuel Raeder)와의 협업 결과물이기도 하다


라 파나세가 위치한 도시 몽펠리에가 속해있는 프랑스 남부의 옥시타니아 지역은 이교도적 문화의 흔적을 간직하면서도 근대 이후로는 교육과 하이테크 산업이 융성한 곳이다. 작가는 이 지역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마늘, 양파, 말린 고추, , 의료용 수술 로봇 등 다양한 그래픽을 파노라마로 펼쳐 보인다. 지역에 관한 조사를 토대로 했다지만, 추출된 모티브들에서 특정한 질서나 규칙을 솎아내기는 힘들다. 고대는 오히려 현대보다 더 가까운 시간대일지도 모른다. 근대의 진보, 발전, 대결 구조 등의 역사의식과 달리 고대는 더욱 플로우하고, 신비롭고, 시간에 관해 주어지는 상상의 영역도 자유롭다라는 그의 말을 힌트로 삼아 유동하는 시공간이라는 개념과 습득한 지식을 자신만의 맥락으로 이동 시켜 재분류하는 하나의 방식을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매체와 오브제> 전시 전경 테이트 모던, 런던

2019 사진:  Tate 2019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그런가 하면 양혜규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블라인드가 주재료로 사용된 솔 르윗 동차動車 2점은 전시의 시각적 중심 역할을 한다. 그간 솔 르윗 뒤집기(2015-) 연작을 통해 천착해 온 입방체 모듈이 자연광에 의한 기하학적 구조물의 변화를 보여줬다면, 각각 입방체 하나 빠진 입방체 위에 6단위 입방체열린 기하학적 구조물 2-2, 1-1 위에 5단위 십자라는 설명이 달린 2점의 솔 르윗 동차動車는 뒤집혔던 구조를 다시 뒤집어 지상에서 땅으로 내렸고, 본체에 손잡이와 바퀴를 달아 동적인 요소를 더한 작품이다. 솔 르윗 뒤집기 16, 23, 184배 등 확장에 확장을 거듭했음에도 알루미늄 블라인드 특유의 양가적 가변성이 강조된 반면, 이번 작품은 프레임으로 둘러싸여 단단하고 명료한 구조적 형태에 더 주목하게 된다. 


동차라는 이름을 달았음에도 묵직함과 정지된 인상이 강한데, 그 대각선으로 배치한 넉 점의 소리 나는 운동(2019) 연작은 좀 더 경쾌하고 가볍다. 천장에 매달린 원형 조각에도 뿔처럼 튀어나온 손잡이를 달아 외부에서 본체를 돌릴 수 있도록 한 것. 작가가 2013년부터 제목에 언급해 온 소리 나는- 조각들의 중심 매체는 방울이다. 방울은 속이 빈 물체를 흔들거나 두드리며 침묵과 부동의 상태를 소리와 호출로 확장시킨 인류의 보편적 경험을 일깨우며, 자연에서 문화로의 이행, 공예와 대량 생산으로 치환되는 문화와 산업의 결합을 형용한다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 방울 역시 민속과 문명에 관한 관심을 반영하는 재료로써 기능한다. 정지된 상태에선 토템이나 상징물처럼 보이던 소리 나는 운동이 회전을 시작하면, 겉을 둘러싼 패턴은 변화하고, 방울의 짤랑거림은 리듬을 완성하기도 전에 희미하게 사라진다.





Installation view <Haegue Yang: ETA 19942018> 2018 

Wolfgang Hahn Prize Museum Ludwig, Cologne, 2018 

© Haegue Yang Photo: Museum 

Ludwig,Šaša Fuis, Cologne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여기에 정해진 날짜, 정해진 시간에만 볼 수 있는 드론 비행까지 합세하면, 이 전시는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릴만한 광경을 선사한다. 비록 광란의 춤을 추는 인간 없이도 구체적 시간과 장소를 이탈한 느낌만으로 어딘가 관능적이다. 가뜩이나 밀도 높은 공간에서 드론이 날아오를 때, 갑자기 낙하할 때, 과감하게 내게 가까워질 때, 유유하게 다른 작품의 주변을 빙빙 돌 때, 속력을 높이거나 낮출 때마다 움직임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의지, 힘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천장에 매달린 4개의 소리 조각, 중간에 자리 잡은 육중한 2점의 동차, 흩어진 짐볼의 가변적 출렁임과 그것이 방출하는 땅의 내음, 자욱하게 흩어지는 연기처럼 부유하고 진동하고 반사하는 모든 것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의식은 휴지(休止)에 돌입한다. 그러나 곧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매개자들(facilitators) 덕분에 찰나의 정지는 끝나고 사태는 다시 시작된다. 이것은 하나의 통합된 장면이자 분열된 순간순간들이다. 역사, 문화, 사회의 양상들을 대범하게 가로지르는 레퍼런스의 출처나 작품의 내막을 알기 위한 버둥거림을 멈추고 일단 감각하기. 예술작품이라 명명되는 형태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인간 전부 흡사 체스판 위에 놓인 기물인 양 말이다.





<양혜규: 움직임을 추적하며> 

전시 전경 사우스 런던 갤러리, 런던, 2019

사진 : Andy Stagg 이미지 제공 : 국제갤러리




열성적인 다작으로 독보적인 아카이브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양혜규의 근작과 더불어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거나 수정한 신작을 공개한 <서기 2000년이 오면>전은 일종의 스핀오프(spin-off)로도 읽힌다. 기존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요소요소 새로운 가능성을 점칠 수 있도록 설정한 까닭에서다. 스스로조차 정확하게 복기할 수 없는 유년의 조각, 1983년에 상상한 서기 2000년과 그 두 시대를 동시에 소환한 2019. 시차 없이 펼쳐지는 장면들을 통해 191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교차하며 재편집된 윤이상과 뒤라스의 연대기뿐 아니라 2018년 비무장지대 도보다리에서의 역사적 만남까지 시간과 장소, 인물이 중첩되고 서로 다른 층위가 뒤섞인다. 우리가 이미 본 것,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 지나갔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과거, 어쩌면 절대 오지 않을 무언가를 아우르는 바로 그 추상적 기시감의 총체야말로 겹겹이 쌓여있는 의미의 코드를 풀어나갈 열쇠가 아닐까.   

 

 

 

양혜규

사진: 안천호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작가 양혜규는 1971년 서울에서 출생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4년 독일로 건너가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에서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했다사우스 런던 갤러리(2019), 몽펠리에 라 파나세 현대예술센터(2018),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2018), 베를린 킨들 현대미술센터(2017), 파리 퐁피두센터(2016), 베이징 울렌스 현대미술센터(2015),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2015), 워커 아트 센터(2009)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선  한국관 대표작가로 선정된 바 있고시드니 비엔날레와 리버풀 비엔날레(2018), 샤르자 비엔날레(2015), 타이베이 비엔날레(2014), 카셀 도쿠멘타(2012) 등의 국제 미술전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10 21뉴욕 현대미술관 재개관전에서 대형 설치작업 <손잡이>를 공개하며, 11월 마이애미 배스 미술관과 내년 여름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에서도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작년에는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로 독일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볼프강 한 미술상을 수상국제 미술계에 다시 한 번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현재 서울과 베를린을 오가며 거주하는 작가는 모교인 슈테텔슐레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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