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진 11월 17일, ‘아트 자카르타(Art Jakarta)’가 개막한 케마요란 자카르타 국제엑스포(Jakarta International Expo, 이하 JIEXPO)는 인도네시아의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열기 가득했다. 동남아시아 최대 아트페어로 꼽히며 올해로 13회를 맞이한 행사는 JIEXPO로 장소를 옮겨 자국 40개, 해외 28개, 총 68개 갤러리와 협력해 그 역량과 존재감을 한층 강화했다. 예술 감독 에닌 수프리얀토(Enin Supriyanto)는 “참가 갤러리와 파트너들의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새로운 장소에서 열리는 이번 페어가 인도네시아, 나아가 아시아 예술생태계의 역동적인 발전을 유지하는 데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행사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지난 2009년 ‘바자 아트 자카르타(Baza Art Jakarta)’로 시작해 2017년부터 ‘아트 자카르타’로 이름을 바꾸고 이어져 온 행사는 ‘생기 넘치는 아트페어(A Vibrant Art Fair)’를 슬로건으로 아시아 현대예술을 역동적으로 선보이는 데 주력한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해 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베트남, 대만, 중국, 일본, 러시아, 호주 등 12개국 갤러리가 참여한 올해 행사는 주최 측 추산 방문객 3만 5,578명으로, 지난해(3만 2,779명)보다 약 2,800명 증가한 수치를 기록했다.
Eko Nugroho <Under The Tree> 2023
Mixed media Variable dimensions
Courtesy of Studio Eko Nugroho
Photo: Regina Sari Dewi
여타 페어와 달리 ‘아트 자카르타’의 특기할 만한 점은 바로 아시아 갤러리만 참여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인지 서로 간의 파트너십과 교류가 그 어떤 페어보다 강조되고,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듯했다. 오랫동안 ‘아트 자카르타’에 참가한 싱가포르 미즈마 갤러리(Mizuma Gallery)의 프레디 샨드라(Fredy Chandra) 매니저는 “‘아트 자카르타’는 작가들의 작품을 대중에게 널리 알릴 뿐만 아니라 예술생태계의 다양한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중요한 정보를 교류하는 자리”라며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대한 포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페어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한국 갤러리들이 눈에 띄었다. 입구 바로 오른쪽엔 아라리오 갤러리가, 중앙엔 백아트와 갤러리이배 부스가 자리하고 있었고, 왼쪽으론 한-아세안 문화혁신 공동협력 프로젝트(ASEAN-KOREA Partnership Project for Innovative Culture) 일환 <Perseverance: Art Cross Cross Borders>가 펼쳐졌다. 2023년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맞아 특별 기획된 이 전시는 그간 미술시장에서 지배적으로 다뤄진 중심지-주변부 모델 대체 논의에서 나아가 여러 방향으로 갈라지는 시장의 흐름을 감지하고 그 사이 전복되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참여 작가는 우리나라 나난, 노보, 박지현, 신지우, 신한나와 인도네시아의 아리 바유아지(Ari Bayuaji), 무리스 루기스(Muhlis Lugis)와 와얀 노비(Wayan Novi), 필리핀의 알프레도 에스키오 Jr.(Alfredo Esquillo Jr.), 코린 드 산 호세(Corinne De San Jose)와 마리아 저나 졸레타(Maria Jeona Zoleta), 싱가포르의 에잠 라만(Ezzam Rahman)과 리우 리링(Liu Liling), 베트남의 하 닌 팜(Ha Ninh Pham), 태국의 마리 파키네(Mary Pakinee), 말레이시아의 사이풀 라즈만(Saiful Razma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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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agini Ratna Wulan <Memory Mirror Palace> 2019-2023 Courtesy of bibit and Art Jakarta
찬찬히 이들의 작업을 둘러보니 예술생태계 구축에 있어 상업 갤러리와 아트페어가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또 미술관뿐 아니라 상업의 영역에서 지역과 국가를 초월한 파트너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트 자카르타’뿐 아니라 중앙자카르타에 위치한 현대미술관 아트:1 뉴 뮤지엄(Art:1 New Museum)에서도 동명의 전시가 11월 14일부터 25일까지 열려 권오상, 양혜규, 강서경을 비롯한 아시아 유명 작가들의 작업을 선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북적이고 혼잡한 갤러리를 둘러보다 보면 중앙에 조성된 ‘하이라이트(Highlights)’ 섹션이 시선을 환기한다. 단연 눈길을 끈 건 2019년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 인도네시아관 작가 야기니 라트나 울란(Syagini Ratna Wulan)의 작업. 반둥에서 태어나 반둥 공과대학(Bandung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순수 미술을 공부하고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Goldsmith College, University of London)에서 문화학을 전공한 그는 가구·인테리어 디자이너로도 활동 중이다.
이번 페어에서 울란은 인도네시아 핀테크 기업 비빗(Bibit)의 후원으로 마련된 ‘STOP. BREATHE. REFLECT’ 섹션을 꾸몄다. <추억의 거울 궁전(Memory Mirror Palace)>(2019-2023)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작업의 연
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178개의 투명 캐비닛으로 구성된 대규모 설치작이다.
Art Jakarta 2023 17-19, November, 2023 JIEXPO
캐비닛 안에는 다양한 사물이 담겨 있고 상단에 이와 연관된 텍스트들이 새겨져 있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글로벌 미술의 관행적 측면에서 오늘날의 예술이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합의뿐 아니라 비판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복잡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처럼 비선형적인 시각적 관용어를 활용한 독특하고 수수께끼 같은 울란의 작업은 자유로우면서도 명상적이고 반성적인 사색과 상상의 여정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이어 박지현의 커미션 작업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향한다. 인쇄 거리가 성행하던 당시 을지로에 작업실을 두고 있던 그는 골목 귀퉁이에 쌓인 합판 목형을 인식하게 된다. 도무송이라고 불리는 이 컷팅 매개체는 종이에 인쇄 후 형태를 잘라내는 성형 칼판인데, 영국 인쇄기 업체 톰슨 프레스(Thomson Press)의 일본식 발음이 그대로 굳혀져 사용되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본래의 기능과 쓰임을 다한 목형을 캔버스 삼아 컬러 레진을 입히고 이를 재구성해 입체적인 화면을 만들거나 새로운 조형을 구축하는 ‘Thomson#’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이번 ‘아트 자카르타’에서는 인도네시아 인테리어 브랜드 타코(TACO)와 협업한 <Thomson 6.1944 S 106.8229 E>를 공개했는데, 타코의 신념인 ‘무한한 창의성으로 변화를 만들다(making change through limitless creativity)’를 바탕으로 지역 워크숍에서 수집한 폐자재를 포함한 다양한 목형을 변칙적으로 쌓아 올려 작업을 완성했다. 의무를 다하고 사라져가는 인간사회의 단면처럼, 층층이 겹쳐진 구조적 형태와 절단돼 사라진 도무송의 형상은 기하학적인 배열과 세련된 컬러 믹스로 페어장을 방문한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자카르타와 서울, 두 도시를 물질적 유사성으로 연결하며 도시 환경에서의 지속 가능한 실천을 고민케 만들었다.
박지현 <Thomson 6.1944 S 106.8229 E>
2023 혼합재료 가변 크기 © TACO
한편 인도네시아 작가 에코 누그로호(Eko Nugroho)는 자국에서 일어난 시민 혁명을 배경으로 성장한 인물로 사회비판적 주제들을 다채롭게 다뤄왔다. 오늘날 인도네시아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신작 <Under The Tree>는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가장 먼저 콘크리트 기둥에 심어진 푸른 야자수는 대기업의 요구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행해지는 자국 열대 우림의 대규모 삼림 벌채와 그로 인해 식물의 다양성은 무시된 채 점차 단일 재배 야자수로 대체되는 세태를 꼬집는다. 그런가 하면 오렌지색 작업복을 입고 기둥에 온몸을 기대어 앉아 있는 사람, 그는 바로 공공시설 청소노동담당자 파수칸 오라니(Pasukan Oranye), 즉 ‘오렌지 부대’다.
지친 기색이 역력함에도 한 손에 쥔 전화기를 놓지 못하는 모습에서 공원이나 거리 등에 앉아서도 수도에 흠이 없는지 등을 끊임없이 확인해야만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끝으로 맞은편에 ‘당신의 목소리는 나의 것’이라는 피켓과 함께 잔뜩 엎드려 있는, 멀끔한 양복 차림으로 표를 구걸하는 정치인의 형상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그른지, 또 누가 선인이고 악인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처럼 누그로호는 미술을 개인의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며 공동체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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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o Suaznabar <El ojo que todo lo ve> 2023 Oil on canvas 81×63cm
이외에도 독특한 지역적 특색과 현대적인 흐름을 반영한 작품들이 전시장 곳곳을 채우고, 3일이란 짧은 기간 탓인지 페어장은 내내 발 디딜 틈 없이 분주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그리고 그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예술적 매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
‘단단한 나무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The firm tree does not fear the storm)’는 인도네시아 속담처럼, 13번의 행사를 치른 ‘아트 자카르타’는 동남아시아 페어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그 역할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나무처럼, 세계 아트 신에서 ‘아트 자카르타’가 더 깊숙이 뿌리내릴 수 있길 기대한다.P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