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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대구포럼 Ⅲ: 누구의 숲, 누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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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30 - 2024.6.2 대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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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에 관한 급진적 성찰성


과학의 자명한 진리가는 이미 오래전부터 부정되어 왔다. 토마스 쿤(Thomas Kuhn)에 따르면 과학은 특정 공동체 내에서 공유되는 문제풀이 방식의 틀, 곧 패러다임으로서 존재할 뿐 그 자체로 참은 아니다. 배리 반즈(Barry Barnes)와 데이비드 블루어(David Bloor)와 같은 과학사회학자들 역시 과학지식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특히 당대 과학자의 사회적 위치와 이해관계는 과학지식의 내용과 형식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두개골의 형태와 인간의 심적 특성의 관계에 관한 골상학 논쟁은 당시 신분제도의 기득권을 혁파하거나 유지하려는 당대 계급 이해관계가 과학자 사회에 틈입한 결과다. 급진적 성찰성은 여기서도 한 발 더 내딛는다.


스티브 울가(Steve Woolgar)는 지식의 구성적 입장을 스스로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진리가 구성된다는 사회학자 자신의 주장 역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급진적 성찰성의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연구자가 자기 자신을 성찰하지 못할 때, 과학에 관한 사회학적 진리 주장은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급진적 성찰성은 예술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컨대 전시의 의미와 당대적 진정성은 전시 주체로서 미술관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그래서 문제는 미술관이다. 동시대 미술의 화두는 단연 ‘비인간(non-human)’이다. 10여 년 사이 소수의 전문 지식인 사이에서 유통되었던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away)의 사이보그·반려종 선언은 이제 미술계의 상식이 된 듯 보인다. 생태와 사물, 비인간에 관한 관심은 2023년 한국의 미술계에서 절정을 맞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시는 지나친 낙관주의와 생태주의, 혹은 공학적 눈요깃거리의 제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라투르가 제기한 “지구공생태”와 이종 간 공존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자”는 해러웨이의 주장은 어떤 미학적 울림을 줄 수 있을까?

대구미술관의 <대구포럼 III: 누구의 숲, 누구의 세계>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대구포럼’이란 단어가 눈에 띈다. 포럼이란, 집단토론의 한 형식을 말한다. 그 집단토론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전시가 기후와 생태의 상황 그리고 과학의 미학적 기여를 집단지성의 형태로 투척하려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동시대 기후위기와 생태의 문제는 과민한 예술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시는 협업의 산물로서 충분히 논쟁적이고 진중한 쟁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전시는 사물-객체와 자연물의 실존적 관심을 표명한다. 전시는 크게 3개의 주제를 다룬다.




이해민선 <절정없는곳: 포즈>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181.8×227.3cm



섹션 1 ‘봄이 왔는데도 꽃이 피지 않고 새가 울지 않는...’은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의 비관적 서사를 원용하고 있지만, 자연을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 그 자체로 보려는 작가의 시선을 담는다. 섹션 2 ‘잊혀진 얼굴, 봉합된 세계’는 자연의 실존적 양상을 다룬다. 하이데거적인 의미에서 실존은 존재의 죽음-소멸의 한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존재론적 상황을 말한다. 그런데 작가들에 의해 확인된, 그러한 생태의 실존을 가장 위협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였다. 섹션 3 ‘세계에 속해 있으며, 세계에 함께 존재하는’은 IT와 과학예술을 보다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생명공생태의 예술적 가능성을 구체화한다. 예술은 새로운 미래의 역동성을 한발 먼저 제안하는 적극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생태의 논리다.

김옥선은 제주도에 서식하는 외래종 식물(종려나무)들을 전면에 찍는다. 그런데 그 식물들은 인간의 미적 취향과 무관하게 성장하고 얽힌다. 그것이 자연이다. 김옥선이 제주의 자연을 이런 방식으로 포착하는 것은 이방인으로 주변과 경계를 유영했던 자신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정주영의 작업은 행성과 성운의 흔적들을 잔잔하게 형태화하는 과정에서 우주적 현상에 내재된 이종성, 다양성, 우연성, 비예측성, 의외성, 우발성, 혼종성을 담으려 한다.


화석화된 플라스틱에 관한 장한나의 오브제 설치 작업은 인공에 스며들어 그것을 자연의 일부로 편입하는 자연의 논리를 보여준다. 장한나의 시선 속에서 플라스틱 조각들은 존재의 의미를 묻는 새로운 실존의 명부에 ‘새로운 돌(New Rock)’로서 자신을 등록한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이해민선의 <육지는 금방 차가워지고>(2012)는 산허리에서 잘려져 붉은 생살을 드러낸 봉우리를 보여준다.

이샛별의 <진공시대-전령사>(2014)는 호주와 한국을 오가며 작가가 체험한 자연의 경외를 표현하는 한편 그 여기저기에서 뭔가 정당하지 못한 서사에 얽매인 듯한 인간의 모습을 위치시켜 놓았다. 무엇보다 이샛별은 인간과 자연의 생태적 모순이 사회적 젠더 모순과 분리되지 않음을 증언한다. 픽셀화된 눈으로 익명화된 여성은 상처받은 채 피를 흘리고 있다. 냉정한 표정의 남성은 어딘가 가해자답게 위압적인 풍모를 보인다.

강홍구의 ‘녹색연구’ 연작은 녹색에 관한 회화적 민족지다. 그런데 그가 포착하는 녹색은 개발의 대상이거나, 개발하고 난 후의 흔적이거나, 아직 개발되지 못한 곳이거나, 개발할 필요가 없는 버려진 것들이다. 도시의 녹색은, 가격이 매겨지고, 매매되는 흥정의 대상이다. 그의 녹색연구는 녹색을 통해 탐색 되는 자본주의 도시의 진면목이다. 새로운 서사는 가능할까.

송상희의 작업은 두 방향에서 진행된다. <정신과 기회>(2021)는 청화백자 타일 형식으로 문명을 자연과 인간, 세계에 대한 서구의 착취와 정복의 역사로 기록한다. 반면 <변신이야기 제16권 코오라, 플레시오사오르스 그리고 리바디어던의 사랑 이야기>(2009)는 이종 간의 경계를 넘은 사랑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종말을 맞는 비극을 그린다. 백정기의 ‘Is of’ 연작은 존재와 소멸 그리고 존재의 소멸을 지연하려는 덧없는 바람에 관한 흔적이다. 그는 먼저 자신이 방문한 장소에서 얻은 자연물을 채집하고, 여기서 천연색소를 추출해 그 장면을 인화한다.




김옥선 <Untitled_beopwhan227>
 2013 디지털 C-프린트 150×120 cm



백정기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천연의 변색과 휘발로 인한 작품의 변화 혹은 소멸을 지연시키려는 의지다. 김유정의 <중간서식지>(2021)는 소위 ‘자연스러움’의 의미를 되묻는다. 그가 목도하는 자연스러움의 진실은 정작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일 뿐이다. 예컨대 실내에서 너무나도 인위적으로 조작된 화초들의 부자연스러움과 이질성은 프레스코 기법을 통해 전면화된다. 생명공생태는 더 이상 상상에 머물지 않는다.

아니카 이(Anicka Yi)의 <모든 섬은 물속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2021)는 개구리 알주머니, 망태버섯 막, 돌연변이 세포의 촉수를 담는 일종의 생명-나무를 형태화한다. 서로를 구분하는 분류의 경계들이 겹치고 엉키는 상상의 영역에서 비로소 상생과 공존의 현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혜정의 <액체몸체>(2022)는 1914년 멸종한 여행비둘기 ‘마사’를 서사 주체로 삼아 형태를 바꿔 순환, 윤회하는 생명-존재의 고리를 탐색한다.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 역시 물리학과 대기 열역학, 항공우주 공학, 생물학 등의 영역을 가로지른다.


<칼 더 업사이드 다운>(2018, 2021)은 30/18/12/8의 숫자로 표시되는 다양한 크기의 유리 구체 안에 호흡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박테리아, 탄소, 미세 유기체 입자 등을 담고 있다. 권혜원은 급진적 식물학의 이름으로 인간과 식물의 상호작용을 다룬다. 그의 렌즈는 식물의 눈을 대신하여 인간의 눈을 관찰하고, 그 눈에 비친 자기-식물을 바라본다. 관찰 주체로서 식물은 객체인 인간의 눈 속에서 자신을 객체화된 형태로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 식물학은 인간과 식물의 일방적인 관계를 상호성의 맥락에서 재구성하고, 그러한 상호성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성찰한다. 그 성찰 속에서 인간의 위대함은 억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저 한순간의 환상이며 착각일 뿐이다.

다시 급진적 성찰성으로 돌아가 보자. 사물과 자연,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관한 미학적 성찰의 진정성은 그 성찰의 주체를 또다시 성찰할 때 가능해진다. 전시의 주체는 바로 미술관이다. 그런데 생태-비인간 담론의 관점에서 미술관은 어떤 존재일까. 미술관은 그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르네상스 이래 인간의 위대함에 관한 과잉된 자각을 실현한 궁극의 실체다. 미술관의 인본주의는 그것을 가장 비효율적이고, 반자연적이며, 가장 화려하고, 가장 낭비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만든다.


미술관이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수단을 파헤친 대지와 숲은 이해민선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미술관이 천재와 걸작의 이름으로 과시하는 권력과 자본은 이샛별과 강홍구의 작업에 함축된 폭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에 따르면 미술관은 관람의 자유를 명분으로 지극히 선택된 계층만이 미술관을 출입하는 현실을 용인해 왔다. 그런 식으로 미술관은 사회적 불평등을 문화적으로 변용하는 게이트 키퍼로 기능해 왔다.

지난겨울 방문했던 그 많은 환경 관련 전시에서 나는 사물과 객체에 관한 미학적 성찰을 지탱할 미술관 자신의 의지를 찾기 어려웠다. 이 문제는 대구미술관의 것이 아니라 미술관의 존재론적 한계에서 기인한다. 오히려 대구미술관의 기획 주체들은 재활용이 가능한 파티션 구조물을 활용해 폐기물을 획기적으로 줄이거나 내실 있는 브로슈어를 활용하는 등 기후·환경·생태 담론의 지평에서 미술관이 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실천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그저 유행처럼 번졌다가 사그라지는 일회성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구포럼의 집단지성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계약이 맺어지는 접점으로서 미술관의 모범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을 전제할 때 이 전시회가 궁구(窮究)하는 질문과 그 대답 또한 집단지성의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자연은 누구의 숲인가? 이 세계는 도대체 누구의 것인가? 과연 이 지구는 누구의 것인가? 인류세의 미술관은 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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