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웰빙(Wellbeing)은 한때 유행했지만 철지난 단어로 인식되는 게 사실이다. 2000년대 초반 웰빙 신드롬 속에서 녹즙기, 클로렐라로 상징되는 건강식품, 여행, 의류와 같은 상품들이 각광받던 시기가 있었다. 웰빙은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이후 국내에서 사용 빈도가 줄었지만, 코로나19 이후 국제 사회에서 다시금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경제, 건강, 교육, 사회 정의의 관점에서 팬데믹 속의 변화된 일상, 경제 체제, 기후, 사회 안전망을 재고하는 움직임이 활발한 가운데, 그 모두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웰빙이다. 모리미술관(Mori Art Museum)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Listen to the Sound of the Earth Turning>은 웰빙을 중심으로 팬데믹 이후 우리의 예술과 삶을 조명한다.
일본에서 웰빙이란 단어가 코로나19 유행 이후부터 통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가 시의성을 겨냥한 것임은 명백하다. 기획 측은 웰빙을 ‘심신 건강하게 지내기’, ‘잘 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이나 행복과 직결되는 개념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는 물론 한정된 라이프스타일을 설파하려는 목적은 아니다. 오히려 전시는 팬데믹 이후 우리가 예술과 관계 맺는 다양한 방법과 상상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웰빙이란 무엇인가’라는 메타 웰빙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전시는 과연 예술과 삶을 어떤 방식으로 관련짓고,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까.
Guido van der Werve
<Nummer negen, the day I didn’t turn with the world>
2007 High-definition video installation
8min, 40sec Courtesy of Monitor Gallery
and Grimm, Amsterdam and Luhring Augustine,
New York Photo: Ben Geraerts
‘지구가 도는 소리를 듣다’라는 전시 제목은 이번 출품작인 요코 오노(Yoko Ono)의 지시문(instruction) 작업 <Grape Fruit>에 포함된 ‘Listen to the sound of the earth turning’을 인용한 것이다. 끊임없이 운행하는 우주 섭리와의 조우를 암시하는 제목은 팬데믹에 의해 사회경제적 인프라와 일상의 시간이 멈춘 상황 속에서 한층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작가의 다양한 문구가 적힌 지시문은 전시 초반부와 더불어 곳곳에 배치되어 감상자가 세계 본질에 의문을 가지도록 자극함과 동시에 각자만의 현실을 꾸며가도록 내면에 깊은 울림을 준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연회색의 좌대 위에 샛노란 가루를 흩뿌린 볼프강 라이프(Wolfgang Laib)의 작품 <Pollen from Hazelnut>(2003)이 눈길을 끈다. 하이라이트 조명에 비친 노란색 사각형의 표면은 파스텔을 바른 도화지나 허공에 뜬 솜과 같기도 하다. 자연스레 가까이 다가가 보고 있으면 은은한 향기가 후각을 통해 전해져온다. 작가가 매년 봄 여름에 집 주변의 숲에서 수주일 길게는 수개월 동안 채취한 민들레와 헤이즐넛 꽃가루로 만든 작품이다. 또 다른 작품 <Milkstone>은 반듯하게 연마한 흰색 대리석 위에 매일 아침 우유를 부어 팽팽하고 매끈한 표면을 구현했다. 마치 종교적 수행을 방불케 하는 제작 과정은, 동양 철학을 깊게 접한 라이프가 스스로 매개체가 되어 자연에 내재된 보편성과 영원성을 체현하는 작업 방식을 반영한다. 이를 통해 정성껏 마련된 생명의 진수(essence)는 마주하는 이를 은은한 명상과 사색의 경험으로 이끈다.
(Reserved Cards)> 1970 Oil on cardboard 12×6cm(each)
Photo: Uchida Yoshitaka+Okano Kei, Katamura Fumihito
Iiyama Yuki <Eating the Patriarchy>
2022 4K video, sound Courtesy of
Wellcome Trust, London and WAITINGROOM,
Tokyo Photo: Kanagawa Shingo
이야마 유키(Iiyama Yuki)는 코로나19 속에서 외부와 차단된 채 은폐되는 가정폭력 문제를 다룬다. 신작 <Eating the Patriarchy>에서 한 여성은 스스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는 식탁 한가득 밀가루 반죽을 펼쳐놓고 사람 모양을 만든다. 얼굴 부분을 늘이고 뭉개거나, 눈, 코, 입, 손발과 같은 신체 부위를 달아 만든 남성 모습의 반죽을 오븐에 구워낸다. 여성은 식탁 위에 펼쳐놓은 빵 인간 옆 가장자리에 누워 흐느껴 울다 이내 먹기 시작하지만, 도중에 채 먹지 못하고 뱉어내고 삼키기를 반복한다.
작가는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소설 『증언들』의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 배우자의 모습을 한 빵을 먹는 것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복수심과 미움의 감정을 극복하고, 이를 살아가는 힘으로 삼는 과정을 그려낸다. 이 작품은 가정폭력을 단지 허구 속의 소재로 국한하진 않는다. 영상과 함께 가정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쌍방의 인터뷰나 감상자의 의견을 전시하는 코너, 각종 상담소를 소개하는 인쇄물을 전시해 최근 고립된 상황 속에서 심화되는 가정폭력 문제를 현실의 차원에서 조명한다.
Kanasaki Masashi <Yamabiko>
2014 Magazines, flyers, and others
31×50×25cm
카나자와 수미(Kanazawa Sumi)의 설치 작업 <Drawings on newspaper>는 언뜻 보기에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의 이미지를 천이나 인화 용지에 인쇄한 커튼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신문지를 겹겹이 이어 붙여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지는 신문에서 눈에 들어온 글자나 공백만 남기고 나머지를 10B 연필로 새까맣게 칠해 구성한 것이다. 검은색 이외의 부분은 ‘러시아군 키에프 침공’, ‘어린이 사상자’, ‘감염자수’, ‘난민선별’과 같은 정치사회 관련 표제, 정치인 및 유명인의 사진, 고흐의 그림과 같은 특정 기사의 일부다.
이때 칠흑과 같은 이면에 가려진 부분과 커튼 모양을 한 전체 디자인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힘이나 경계를 은유적으로 나타낸다. 카나자와는 코로나19 전에 출산과 육아를 겪으면서 예술가로서 세상과 단절되었던 경험을 토대로, 개인의 닫힌 공간에서 세계나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제작 방법을 고안했다. 바로 이 작품을 위해 매일 저녁 10시부터 오전 3시까지 신문을 빽빽하게 칠하며 보낸 까만 밤은 그에게 있어 현재의 시간을 증언하고, 사회와 소통하는 가장 절실한 방법인 것이다.
전시 끄트머리엔 동양 사상에 기반한 세계관을 현대적 기법으로 해석한 차이 차웨이(Tsai Charwei)의 작품이 놓였다. 밀교의 양계만다라를 형상화한 설치 작업 <The Womb & The Diamond>(2021)는 다양한 크기의 원형 거울 위에 유리와 다이아몬드를 배치해 마치 명품 진열관이나 과학 실험실과 같은 인상을 준다. 여기서 거울은 방향이나 색, 중심과 주변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 전체를 나타내며, 이를 감상하는 우리 또한 우주의 일부분임을 자각하게끔 하는 장치가 된다. 회화 연작 ‘Five Sky Dancers’는 티벳 불교에서 행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의 여신 다키니를 모티브로 한다.
Ellen Altfest <Trees>
2022 Oil on canvas 30.2×26cm
Courtesy of White Cube Photo: Thomas Müller
각각의 작품은 노랑, 빨강, 검정, 초록, 파랑으로 우주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흰색의 산스크리트어 문자를 이와 함께 배치해 여신의 운동성을 나타냈다. 작가는 코로나19 이후 되도록 자연환경에 대한 영향을 줄이기 위해 천연 재료만을 사용해 색상을 구성하는데, 이때의 안료들은 과거 실크로드를 거쳐 티벳의 경전 구절에 쓰였던 점을 감안해 선택한 것이다. 동양 사상에서 차용한 조형 요소와 아시아를 횡단한 인간 및 비인간의 장구한 역사를 신중히 결합해 개인과 우주를 잇는 예술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전시는 팬데믹 이후의 일상, 사회 이면의 갈등, 예술과 삶의 일치,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테마로 관람객에게 다양한 감각을 선사한다. 전시 부제에 ‘팬데믹 이후’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코로나19로 인해 변화한 일상과 앞으로 맞이할 삶 모두를 상상하는 것이 전시의 의도인 셈이다. 현실에 대한 주의 깊은 성찰을 공유 가능한 형태로 체현함으로써, 우리가 세계를 보고 느끼는 방식을 일깨우는 계기를 마련한다. 자칫 진부한 슬로건에 그칠 수 있는 웰빙이라는 주제를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실천과 예술의 접점을 통해 드러내고, 인간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영적 순간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웰빙이란 하나의 정해진 지침이 아니라, 하루하루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의 지혜와 경험을 나누는 삶 꼴이 아닐까? PA
Tsai Charwei <The Womb & The Diamond>
(detail) 2021 Hand-blown glass, mirrors,
and diamond 300×600cm Installation view of
<Charwei Tsai: The Womb & The Diamond>
Live Forever Foundation, Taichung, 2021
글쓴이 권상해는 도쿄예술대학에서 예술학 전공으로 석사학위, 아트프로듀스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현대미술 연구와 더불어 미술과 공연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큐레토리얼 실천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도쿄에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며 전시 기획, 퍼포먼스 플랫폼 Stilllive 운영, 글쓰기, 번역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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