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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05, Oct 2023

데이비드 살레_World People

2023.9.5 - 2023.10.28 리만머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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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예지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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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서 눈으로(Eye to eye)


데이비드 살레(David Salle)가 그린 나무는 그저 나무가 아니다. 경로(path)다. 눈에서 눈으로 통하는 길이자 이질적인 요소를 중개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Tree of Life’ 시리즈에서 화면은 상단 패널과 하단 패널로 나뉘어 있는데, 한 그루의 나무가 두 부분을 관통하며 서로를 연결한다. 하단 패널에 단단히 뿌리 내린 나무는 패널 사이의 경계면을 뚫고 올라와 가지를 뻗는다.


좌우로 뻗어 있는 가지는 인간사의 한복판에 침투한다. 살레의 그림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즉 우리의 눈이 어떻게 움직이며 무엇을 맞닥뜨리게 되는지 이야기해 보자. 저항을 줄이고 순순히 길을 따라간다면 뜻밖의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삶에 주어지는 선물처럼.

‘Tree of Life’ 시리즈를 볼 때,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를 사이에 두고 둘로 나뉜 공간을 본다. 아무런 구획 없이 사방으로 뻗어나갈 때, 공간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아직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미결정 상태다. 우리의 눈은 길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나 화면 위로 붓이 지나가면서 모든 게 변한다.


길이 생기고 자리가 생긴다. 자리가 있으니 사람이 들어선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무대 위로 하나 둘 등장하는 배우처럼. 사람이 하나라면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둘이라면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셋이라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비로소 드라마가 시작된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결말이 어떠하든, 우리는 계속 따라간다. 살레의 그림에는 분명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소가 있다. 비밀스러운 무엇이.

그 비밀은 색에 있다.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무성 영화 속 인물들이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듯이, 살레의 인물들도 풍부한 표정과 과장된 몸짓을 표출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오직 흑과 백, 회색 음영으로 표현된 인물에서 어떻게 그런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무언가를 잘 나타내려고 할 때, 우리는 자꾸 이것저것 추가하는 경향이 있다. 색을 더하고 단어를 더하면 내가 포착하려는 것이 살아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반대로 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Tree of Life, Prayer Works> 2023
 리넨에 유채, 아크릴릭, 연필 76.2×53.3×2.5cm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 David Salle/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 아니라 그 이면의 본질이라면. 인간 본성을 정확하게 그려 내는 문학이 우리 안의 천사와 악마, 선과 악, 빛과 어둠을 조명하듯이, 그림도 일부러 대립적인 구도를 도입하고 명암을 극대화하면서 인물의 본성을 효과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이 ‘효과적’이라는 말은 살레의 경우 ‘입체적’이란 말로 바꿔 말할 수 있다. 1920년대 『뉴요커(The New Yorker)』의 삽화가 피터 아르노(Peter Arno)의 캐릭터를 차용하면서 살레가 실험해 온 것이 바로 이런 효과다. 말을 아낌으로써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듯이, 색을 아낌으로써 욕망의 다채로움을 더 많이 응축한다. 제한된 색 대신에 탄력 있는 윤곽선이 힘을 발휘하고, 인물에게 드리워진 희비극의 그림자가 한층 더 선명해진다. 그리하여 단 하나의 장면에 인간 사회의 보편적 갈등 구조와 모순이 들어앉는다. 시대의 단자처럼, 옹골차게.

살레 그림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물과 대조적으로, 그림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나무와 배경은 채도 높은 색깔들로 칠해져 있다. 패턴에 갇혀 진부해진 건 인간일 뿐(되풀이되는 ‘사랑과 배신’이라는 뻔한 레퍼토리에 갇혀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끝없이 갱신되는 중이다. 특히 자연의 순환은 업보에 의해 굴러가는 인간사의 순환과 다르게 늘 자유롭고 충만한 흐름이다. 저 나무를 보라. 치렁치렁 걸친 인간과 달리 헐벗은 겨울나무의 핏줄에는 이미 새 봄의 기운이 팽팽하게 충전되어 있다.


나무에서 보이는 빨강, 파랑, 노랑의 움직임은 변화의 에너지로, 보는 이의 눈을 계속해서 끌어당긴다. 이것이 바로 성공적인 그림에 담긴 ‘내부의 에너지(Inside Energy)’다.1) 살레는 ‘Tree of Life’ 시리즈를 그리는 동안 이전보다 “덜 저항적이고 더 즉흥적이게 되면서 이미지에 충실하게 되었다”고 한다.2) 화가의 눈이 나무라는 통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것처럼, 관람객의 눈도 그 궤적을 따라 (때로는 이탈하면서) 화면을 맘껏 누빌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뭇가지가 혓바닥처럼 길게 늘어나며 인물의 턱 끝이나 뺨을 스칠 때, 우리의 눈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인물에게 다가간다. 또 신작 <Tree of Life, Couple>을 보면, 인물들의 대치 상황 뒤로 진초록 선이 덩굴처럼 엉켜 있는데, 이는 시각적으로 좌우 대칭인 화면에 불안정성을 도입한다. 눈은 그 선들과 함께 휘몰아치면서 불안감을 느낀다. 이처럼 살레의 그림은 고분고분 길들여진 화면이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포용하는 화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람객은 지루할 틈 없이 색과 선의 미묘한 충돌을, 이질적인 것 사이의 대화를, 정적인 균형이 아니라 역동적인 균형을 음미할 수 있다.



<Tree of Life, Gender Roles> 2023
리넨에 유채 182.9×248.9×3.8cm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 David Salle/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살레에게 ‘균형’이란 기본적으로 구도와 구성에 관한 것이다. 특히 상단 패널과 하단 패널의 서로 다른 개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것은 그 자신이 ‘Tree of Life’ 시리즈를 실험하면서 가장 도전적으로 느꼈던 점이기도 하다. 위아래 패널을 각각 아름답게 그렸다고 하더라도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실패작이 되고 만다. 살레는 이 위험을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두 구역 사이의 긴장을 조율해왔다. 이처럼 극히 다른 스타일을 띤 부분들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것. 살레는 이 정교한 균형을 “섬세한 오케스트레이션(delicate orchestration)”이라고 부른다.3)


살레의 그림에는 여러 층위가 동시에 작동한다. 앞서 살펴본 구조적 층위 외에 주목할 만한 것은 서사적 층위와 도상적 층위다. <Tree of Life, Prayer Works>를 보면, 주황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그림 하단에 토르소가 보인다. 만약 이것이 ‘질서와 균형의 신’ 아폴론의 토르소라면, 신의 머리가 잘려 나간 몸체는 무질서와 불균형, 인간의 불완전함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녹색으로 칠해진 ‘생명의 나무’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신 또는 우주의 완전성을 가리킨다.


이런 대조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연상시킨다. “거기 두 개의 눈망울이 무르익고 있던/ 아폴로의 엄청난 머리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토르소는 지금도 촛대처럼 불타고 있다,/ 거기에는 그의 사물을 보는 눈이 틀어박힌 채,// 그대로 남아 빛나고 있다.”4) 이 시의 마지막 부분은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유명한 구절로 마무리된다. 이 메시지를 살레의 토르소에 맞게 변형해 보자. 우리는 저마다 불타고 있는 토르소다. 몸에 틀어박힌 채, 오랫동안 감겨 있던 눈을 뜨자. ‘사물을 보는 눈’을 회복하고 본래의 완전함으로 돌아가자.

지상에서는 언제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면 얼마나 부단한 시각적, 심리적 훈련이 필요할까? 그런 의미에서 ‘Tree of Life’ 시리즈를 일종의 ‘균형 감각 훈련장’이라 부르고 싶다. 이 시리즈에 몰두한 몇 년 동안, 살레는 인간 사회의 불균형에 압도되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거리를 확보했다. 유머 감각 또한 잃지 않으면서. 그의 그림은 여성과 남성, 성(聖)과 속(俗), 의식과 무의식, 표면과 심층 등 상반되는 요소가 병치되면서 관람객의 내면에 감정적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깔끔하게 분할된 화면과 그 속에 배치된 상반된 요소는 시각적으로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그런 안정성 이면에는 인간 관계의 모순에서 비롯된 긴장이 깔려 있다. 이것은 살레가 고안한 그림 언어를 통해 표현된다. 그가 구성한 화면을 하나의 천칭에 비유한다면, 미세하게 흔들리는 저울 팔처럼 선들이 계속해서 떨리고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특히 화면을 수직으로 분할하는 나무의 몸통과 나뭇가지의 선 그리고 흙 바닥처럼 낮게 깔린 곳에서 휘몰아치는 붓 터치가 그런 리듬을 자아낸다. 이렇듯 <World People>은 그림과 끝없이 대화하면서 연마한 살레만의 공력(工力)이 경쾌하게 풀려나오는 자리다.  

[각주]
1) David Salle, How to See: Looking, Talking, and Thinking about Art, W. W. Norton & Company, 2016, p. 1
2) 2023년 9월 7일,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World People>(2023)을 계기로 데이비드 살레와 만나 40분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때 작가가 답변한 내용을 참고했다.
3) 같은 인터뷰에서 인용
4) Rainer Maria Rilke, Neue Gedichte (1907): 손재준 옮김, 『두이노의 비가』, 열린책들, 2014, p. 201



* 전시 전경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 David Salle/VAGA at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Photo: OnArt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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