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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07, Dec 2023

박병욱_벽, 그리고 향

2023.10.10 - 2023.11.18 김세중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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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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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형상의 내부로부터
외부 세계를 향한 조각적 공간의 고전


“누군가 알베르토에게 물었다. 조각품들이 작업실에서 나간 후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미술관에? 그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땅에 묻어야죠. 그것들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다리가 되어줄 수 있게요.” (존 버거가 쓴 “마르크 트리비에의 <나의 아름다운>” 중에서)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저 마주 보이는 오각형 집 모양의 큰 벽과 창문 때문에, 그 앞에 서 있는 인간 형상의 조각상 때문에, 나는 존 버거(John Berger)가 쓴 마르크 트리비에(Marc Trivier)의 사진에 관한 글을 떠올렸다. 그 사진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가늘고 긴 인간 형상 조각과 그의 아내 아네트의 흉상을 트리비에가 “적절한 장소와 조명”에 맞춰 계속 품 안에 들고 옮겨가며 찍은 것으로, 버거는 그 사진 속 인물상들이 수영장에 있는 사람들처럼 “흐릿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는 그 흐릿함에 대해, 그의 아름답고 존엄한 통찰로, “그 자체의 불투명성을 지니고 있”는 “생각하는 행위”와 관련 있다고 했다. 어떤 존재의 (취약한 몸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비극에 맞서, 바라보고 있는 상대의 몸 안에 남겨진 (미지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공동의 움직임”을, 버거는 “흐릿함”과 “생각”이라는 단어의 비약적인 연결 속에 서술해 놓았다. 이 조각[자코메티]과 사진[트리비에]과 글[버거] 사이에 흐르는 생각의 움직임들은, 버거가 말했던 것처럼, “보는 이의 희망에 응답”함으로써 아름다움에 가서 닿는다.

트리비에의 사진을 순간적으로 떠올리게 했던 한 (작고한) 조각가의 전시장은, 회색 받침대에 올려진 인간 형상의 조각들에서 그것을 둘러싼 빈 공간의 형태가 느껴질 만큼 어떤 시선과 움직임과 침묵의 자리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조각가 박병욱의 전시 <‘벽(壁), 그리고 향(向)’>은 그의 죽음 이후 그 다음 해에 열린 유작전(갤러리현대, 2011)으로부터 12년 만에 열린 회고전이다. 흙 소조 작업 후 브론즈로 캐스팅한 1970-1980년대 인체 조각이 대부분이었는데, 돌이나 나무를 깎은 조각도 더러 있고, 후반부의 작업은 지점토(papier mâché)를 주재료로 사용해 더욱 추상화한 인체 형상의 면면을 드러낸다.




전시 전경 사진: 손미현



전후 ‘새로운 인간 형상(New Images of Man)’을 탐구하고자 했던 한국 구상조각의 범주에서 논의되어온 그의 작업은, 그의 가족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이탈리아의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Marino Marini)에 대한 동경과 서울대 조소과 재학 시절(1957-1964) 스승인 김종영과 김세중의 영향 안에서 구체적인 조각적 인식을 제시해왔다. 재료와 조형적 특징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작품 제목에 담긴 조각 개념에 관한 미학적 성찰은 송영수와 민복진 같은 기성 구상조각가들의 관심사와도 폭넓게 겹쳐 있다.

그러한 미술사적 참조를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내가 본 박병욱의 조각은, 어떤 고전적인 미의식과 함께 이 형태 앞에서 재료를 어루만지며 미지의 표면에 다가가고자 계속해서 움직였을 조각가의 시선과 두 손과 침묵의 공간 같은 것이기도 하다. 전시장 입구에는 녹색 브론즈 표면의 매끈함과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움직임을 지각하고 상상하게 하는 두 개의 조각이 공간의 여백을 한껏 증폭시켜 놓는다. <망(望)>(1977)과 <갈(渴)>(1978)은, 작품 제목이 각각의 조각에 함의된 동세를 지시하듯, 외부 세계를 향한 (그 자체의) 시선과 몸짓을 자신의 신체 내부로부터 끌어내 발산한다.


인체의 해부학적 사실에 의존하기보다는 실존적인 사유의 토대 위에 구축한 이 인간 형상의 조각은, 무게 중심에 해당하는 형태의 기원을 사실적인 조각들과 마찬가지로 조각 내부의 심연에 자리하게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말하자면 조각으로서 자신의 형태에 관한 지각과 인식이 외부 세계(의 존재)와의 공모(共謀)로 드러나게 되는 다수의 상황을 자처한다.



<념(念)> 1986 화강석 56×76×43cm 
사진: 손미현 개인 소장



전시장 한쪽 모서리에 긴 창을 등지고 있는 여인 좌상은 그것이 놓인 자리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눈길이 많이 갔다. 직선과 곡선이 적당히 섞인 조각의 윤곽선 때문이기도 했고, 형태 안에 가득 찬 양감과 완전히 비어있는 공백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다. 원시적인 조형적 단순함과 유기적인 구성이 강조된 <만월(滿月)>(1982)은, 정면에서 볼 때 그가 자주 표현하는 동세로서 한쪽 다리를 살짝 세우고 앉은 여인의 포즈를 드러내고 있다.


상체는 정면을 똑바로 향하고 있지만, 얼굴은 오른쪽 하늘을 향해 돌려 있고 그 시선이 향하는 텅 빈 공백을 가늠하듯 두 손은 어떤 것을 형상화하며 허공을 향해 뻗어 있다. 이 앞에서 나는 자코메티의 수수께끼 같은 초현실주의 조각 <Hands Holding the Void(Invisible Object)>(1934)를 함께 떠올리면서, 조각 바깥의 공간을 향하여 인간 형상이 스스로 드러내는 실존적인 부재와 그것을 조각적 양감과 윤곽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조각가의 인간적인 성찰에 다가가보려 했다.

<만월>은 가득 찬 달의 형상을 두 손으로 허공에 그려내고 있는 인체와 함께 그 신체 내부에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다시 말해 몸통과 두 개의 다리 사이에 움푹 파인 둥근 공간이 어떤 닮음을 반영함으로써 조각적 공간에 대한 지각과 인식을 확장시킨다.


게다가 측면으로 돌아서서 봤을 때, 조각의 왼쪽에서는 그 부재의 표상마저 볼 수 없는 완전한 시각적 부재에 직면해 최소한의 직선과 면을 볼 테고, 조각의 오른쪽에서는 (개념상) 달의 윤곽과 맞닿아 있으면서 일종의 몰드 역할을 하는 움푹한 손바닥과 얼굴의 정면과 비로소 보이는 토르소의 흐릿한 양감과 공백을 감싼 둥근 하체의 그림자까지 모두 보게 될 테다.

박병욱은 빛과 그림자에 둘러싸인 이 브론즈 조각 이전의 원형, 즉 흙으로 이 형태의 원형을 빚으면서 평평한 받침대 위에 홀로 온전하게 세워질 좌상의 형태를 완성시키기 위해 조각 내부의 무게 중심을 살폈을 것이고, 동시에 이 형태가 외부 세계와 공모하게 될 조각적 공간의 가능성을 한없이 상상해냈을 것이다.



<만월(滿月)> 1982 청동 125×68×67cm 
사진: 손미현 개인 소장



조각가로서 그의 조형적인 감각은 인체에 집중된 고전적인 토대 위에 확장해 있다. 박병욱은 인체 군상이라 할 수 있는 <향(向)>(1975)으로 제24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에서는 거의 똑같은 형태의 세 인물이 한 몸처럼 빈틈없이 포개어진 채 대각선 방향의 강한 동세를 드러내며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조각의 표면을 감싼 부드러운 옷과 그 내부의 해부학적 형태를 개연성 있게 표현하는 고전적인 조각의 기법을 통해 형태의 내적 조형성을 충실히 표현하면서, 그는 이 인체 군상의 시선이 향하는 하늘로부터 수직축을 내려 세 인물 사이의 핵심 공간을 관통하게 하고, 거대한 원뿔 공간을 그려냄으로써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의 세례처럼 비가시적인 상상적 공간으로 나아가게 한다.

<상(像)Ⅲ>(1982) 같은 작업은 특유의 구상조각적 특징이 강조되어 작고 왜소한 양감을 가진 인체의 변형과 해석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그 형태 내부에 선적인 축들이 좌표처럼 즐비하게 놓여 있고 조형적인 균형 상태의 긴장을 나타내면서 추상을 넘어선 선과 면과 덩어리의 인체 구성과 연쇄 작용을 보여준다.


조각가와 이 인간 형상 사이에 주고받은 일종의 공모가 시각적인 유희 이상의 즐거움을 주곤 하는데, 접힘과 펼침, 응축과 발산과 같이 이 조각 앞에 마주한 신체의 움직임이 곧 경험하게 될 무한한 가능성은 조각이 지닌 삼차원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갖게 된 비극, 즉 무한한 형태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임을 알게 될 테다. 등 뒤로 빼서 이 빈약한 신체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오른손의 침묵 같은 자세를 보면, 그렇다.

박병욱은 뇌졸중 투병 중 오른손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면서, 1997년부터는 지점토와 왼손 드로잉을 통해 창작을 이어갔다. <동반>(2008)은 그가 죽음을 앞둔 말년에 제작한 작업으로, 조각의 원시적인 부동성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애초에 조각이 인간 형상의 기원에서 출발해, 그것(인간 형상)이 소멸하게 되더라도 실존하게 될 세계를 조각으로 꿈꿔왔던 것처럼, 조각가 박병욱은 조각의 기원과 인간 형상에 대한 실존적인 사유[생각]의 행위를 통해 조각적 공간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여느 조각가들처럼 말이다.  


* 전시 전경 사진: 손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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