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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e 210, Mar 2024

전원근_식물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

2024.1.12 - 2024.2.24 초이앤초이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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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연 수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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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초상


그저 나고 자란 곳에 머물며 피고 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다 어느 날 스러져 땅으로 돌아간다. 식물의 생애다. 청각은 오감 가운데 유일하게 이 생애와 맞닿지 않은 감각이다. 말없이 물, 빛, 흙만을 필요로 한 채 평생 자신으로 살다 사라지는 식물에게 표현과 반응의 도구로써 청각이란 태초에 부여받지 못한 영역의 것일지도 모른다. 전원근은 창가에 놓인 화분 속 식물을 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소리 없이 고유의 색과 향을 언어의 유일한 질료로 삼는 식물이 지극한 손길로 묵묵히 오랜 시간 쌓아 올린 자신의 화폭과 닮았기 때문이다.


색과 향만이 식물의 언어이듯 그의 작품도 절제된 색상과 기법으로 완성된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네 가지 색상만 사용한다. 이외 필요한 색은 수많은 시도와 조합을 통해 얻는다. 색 위에 시간을 얹고 물과 붓으로 지운 다음 다시 색을 올리는 작업을 반복한 결과 그만이 소유할 수 있는 색들이 캔버스 표면에서 조우한다. 점, 선, 면. 기본적인 세 가지 요소가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식물이 사계를 거울처럼 비추듯 작가도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며 작업을 이어간다.




<무제>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80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HOI&CHOI Gallery



갤러리 입구에 온갖 물감이 혼재된 천이 놓여 있다. 한 해 동안 작가의 작업실 바닥을 지키던 천이다. 작품과 한 공간에서 그의 고민과 기억을 나눈 또 다른 그림이다. 1층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그만의 팔레트들이 펼쳐진다. 직선과 곡선, 단색과 한정된 색의 중첩으로 완성된 각 회화는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식물의 언어’가 무엇인지 가만히 귀 기울이게 한다. 시각을 주로 활용하되 청각에 관한 궁금증을 품고 그림을 보던 와중에 만난 것은 작가 본인이 쓴 시(詩)다. “화분에 심겨진 난초가 갑갑해 할지”로 시작해 “그 마음을 그 누가 알까?”로 끝나는 시는 작품과 전시가 식물을 향한 그의 이입에서 비롯하였음을 드러낸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싱그러움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식물의 묘한 향이 전시관을 채운다. 이번에도 전 작품이 무제다. 전원근은 제목의 자리를 비웠다. 당신의 색과 향은 무엇인지, 당신의 언어는 무엇인지 묻는 듯 말이다. 이로써 관람객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작품에 마음을 열고 몰입한다. 강렬하고 화려하지 않아 무한한 인상을 주는 전시작들은 식물의 삶 일부를 그린다. 늦봄 혹은 초여름에 볼 수 있는 잎의 푸른빛은 없다. 대신 여름의 끝과 가을 내내 볼 수 있는 잎의 농익은 음영이 있다. 다수가 쉽게 주목하는 생의 찬란한 시절로 인해 저물어 잊히기 쉬운 시기도 작가는 기억하고 싶은 듯하다.




<무제>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70×5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HOI&CHOI Gallery



그의 개인적 경험이 담긴 그림 한 점 한 점을 보며 가장 오래 멈춰 있던 순간은 각 작품의 이면을 만났을 때였다. 수행과도 같은 그의 시간이 정면뿐 아니라 그림 위, 아래 그리고 옆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결과인 캔버스 너머에 과정으로서 기록된 가장자리의 몫이 있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 것. 보통 보고 싶은 것이 아닌 것. 그렇기에 애써 보려 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 과정은 그렇게 일상에서도 일생에서도 목소리 없이 늘 결과에 가려져 왔다. 전원근은 과정과 관람객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두었다. 과정이야말로 삶의 생생한 감각임을 작품 안팎으로 은유한다. 그 선연한 궤적과 그림 정면을 가만히 번갈아 보고 있으니 어느덧 나의 생애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전시는 루프톱까지 이어진다. 작업실 바닥에 자리 잡았던 또 다른 천이 이곳에 있다. 수백 번에 걸친 붓질과 마르기, 닦기, 새로운 붓질이 반복되었던 시간의 잔재가 전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25년 넘도록 유럽에 머무는 작가가 몇 달 집을 비워도 살아있는 식물은 조용히 그리고 강인하게 그와 생의 한때를 공유하고 있다. 전원근이 식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았듯 나도 식물의 언어와 조응을 이루는 그의 화폭에서 나를 마주했다. 무언이라 하여 무용한 것은 아니다. 식물의 언어도 생의 언어도 그러할 것이다.  


* <무제> 2023 캔버스에 아크릴릭 60×55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CHOI&CHOI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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